盧당선자 "현실타령 마라"…공무원들 "몸조심하자"

  • 입력 2003년 1월 30일 17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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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관료사회를 겨냥해 ‘현실타령’만 하지 말고 공무원들이 개혁의 주체로 나서 줄 것을 당부한 이후 관가에는 오히려 ‘보신주의’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 당선자는 지금까지 공무원들에게 돈타령, 정치타령, 법타령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일선 부처 공무원들은 “관료들의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파격적인 주문”이라며 어떻게 처신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노 당선자가 돈타령을 하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로 정책화할 것을 지시하자 행정부처들은 예산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을 내놓고 있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에 대해 예산을 생각하지 않고 화려한 청사진만 제시하는 것은 직무유기나 마찬가지”라고 어려운 입장을 호소했다.

최근 노 당선자가 농정실패 책임을 물어 농림부 관료들에게 “아무리 정치가 엉망이었다고 해도 정치인들을 설득하지 못한 공무원들은 도대체 뭘 했느냐”며 ‘정치 타령’을 하지말라고 지적한 대목에 대해서도 공무원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다. 국회를 담당하는 행정부처의 한 국장은 “농정 실패를 일방적으로 공무원의 잘못으로 떠넘기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농정 실패는 수십년간 정부 발목을 잡아온 국회와 정치권의 책임이 더 크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노 당선자가 자신의 공약사항인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에 대해 “현행법 해석을 바꿔서라도 제도 도입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지시하자 정책실무자들은 “공무원들이 현실 법 체계를 외면하면서까지 정책을 입안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최근 노 당선자가 인수위에 파견된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부처의 ‘스파이’ 노릇을 할지 아니면 ‘개혁의 선구자’가 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다그친 데 대해서도 공무원들은 씁쓰레하고 있다. 노 당선자의 공직사회에 대한 불신감이 도를 넘어섰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부처의 한 공무원은 “당선자가 관료사회의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파격적인 주문을 내놓자 책임 있는 간부들 사이에서조차 ‘5년 동안 조용히 몸조심하는 게 낫겠다’는 보신주의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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