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 국민의 정부 1]김중권 비서실장 등장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6시 46분


김중권 비서실장은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99년 11월 청와대를 물러나올 때까지 명실상부한 권력의 2인자였다. DJ 스스로 공사석에서 ‘우리 정권의 2인자’라고 치켜세웠던 김 실장 앞에서 DJ의 측근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김중권 비서실장은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99년 11월 청와대를 물러나올 때까지 명실상부한 권력의 2인자였다. DJ 스스로 공사석에서 ‘우리 정권의 2인자’라고 치켜세웠던 김 실장 앞에서 DJ의 측근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본보는 2003년 신년호부터 ‘비화(秘話) 국민의 정부’를 매주 1회 연재합니다. △권력 비화 △권력 스캔들 △경제 비화 △외교 안보 비화 등 4부에 걸쳐 연간 게재될 이 시리즈의 근본적인 목적은 현 정부 출범이후 5년간의 집권 기간에 대한 공정한 결산과 평가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이 시리즈는 새 정부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노무현(盧武鉉) 당선자의 집권준비에도 타산지석이 될 것입니다.

본보는 이 시리즈를 통해 ‘국민의 정부’를 내걸고 출범한 현 정부가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저질렀던 권력주변 비리를 되풀이 한 과(過)의 부분 뿐만 아니라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분단이후 처음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공(功)의 부분도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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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권력의 뒤안에서 벌어진 권력주체들의 파워게임과 그에 따른 실세들의 영욕 및 흥망의 뒷얘기도 파헤쳐 독자들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흥미본위의 얘기를 하려는 목적 보다는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예화로 주로 활용될 것입니다.

본보는 독자들의 참여 속에 ‘신뢰받는 신문’을 지향하기로 한 약속대로 독자여러분들의 제보를 시리즈에 적극 반영하고자 합니다.

제보전화 02-2020-0670》

'국민의 정부’ 출범직후인 98년 봄 어느 일요일 오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의전비서실에 급히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을 찾을 것을 지시했다. 전화로 이곳저곳을 수배한 끝에 자신이 장로로 있는 서울 약수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던 김 실장을 겨우 찾아낸 의전팀은 “대통령이 찾는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 실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과거 정권의 비서실장이라면 즉각 청와대로 달려오는 것이 상례였지만 김 실장은 “대통령께 ‘내가 지금 예배보고 있는 데, 중요한 일이면 지금 갈 테고 그렇지 않으면 예배보고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씀드려달라 하더라’고 전해달라”고 의전팀에게 말했다.

의전팀 관계자들은 경악했으나 DJ는 이말을 전해듣고 “알았다. 급한 것은 아니니까. 그냥 예배보라고 해라”고 말해 의전팀 관계자들을 한번 더 놀라게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국민의 정부 초기 김실장의 인사 독주에 대한 여당쪽의 불만이 비등하자 이종찬(李鍾贊)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대통령에게 관련 보고서를 올렸다. DJ는 그 보고서를 즉각 김 실장에게 내려보냈다. 결국 이를 거꾸로 알게 된 국정원측은 김 실장과 관련된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리는 것을 피했고, 이 때부터 권력기관끼리의 ‘견제와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고 국정원의 한 핵심관계자는 전했다.

이에 앞서 대선직후 DJ의 당선자 비서실장 시절. 이미 김 실장은 청와대 조직개편을 자신의 입맛대로 좌지우지했다.

우선 김 실장은 비서실 공조직을 통한 대통령 접근 원칙을 분명히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시절 김광일(金光一) 비서실장과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간의 파워게임, 차남 김현철(金賢哲)씨의 국정농단 등으로 청와대가 제기능을 못했다는 정치권의 자성이 김 실장체제를 공고히하는 데 이론적 무기의 역할을 했다.

비서실 직제개편은 98년 1월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3박4일간 김중권-이강래(李康來!?훗날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장성민(張誠珉!?훗날 청와대 상황실장) 라인이 주도했다. 골격은 11개 수석비서관실을 6개로 통폐합하는 것이었다. 수석급이었던 총무비서관 법무비서관(구 민정수석)의 직급을 한 단계 낮추고 상황실장과 함께 비서실장 산하에 두기로 했다. 돈(총무) 인사(법무) 정보(상황실)를 모두 비서실장이 장악하게 된 셈이다.

당연히 DJ의 직계인 동교동계와 여당관계자들의 불만이 높았다. 그러나 이런 여론을 전한 당내인사에게 김 실장은 “김 대통령은 참모들이 주도적으로 끌고가야 한다. 그게 내가 파악한 김 대통령의 성격이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DJ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와 ‘수직 상하관계’였으나 김 실장만은 달랐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실장의 파워는 98년 2월25일 국민의 정부가 공식취임한 이후 한층 막강해져 갔다. 정권 초기 김 실장의 위세를 보여주는 단적인 에피소드는 DJ의 핵심측근이자 ‘입’으로 통했던 박지원(朴智元) 공보수석 마저 김 실장에게 ‘충성맹세’를 했다는 점이다. 박 수석은 정권출범 직후 김 실장에게 “모든 일은 실장님과 상의하고 충성을 다하겠다. 최선을 다해 잘 모시겠다”고 맹세했다. 박 수석 본인도 ‘충성맹세’ 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후일 충성맹세의 진위를 묻는 기자들에게 “당시에는 김 실장을 잘 모시는 것이 청와대를 편안하게 하는 일이고, 나라가 잘 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대통령을 잘 모시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박 수석의 DJ 독대는 김 실장의 신경을 건드렸다. 박 수석은 정권출범 이후에도 아침 7시반경이면 어김없이 관저로 출근, 그날 그날의 대통령 메시지를 구술받았다. 오랜 야당시절의 관행이었지만 이는 대통령과의 ‘거리’로 파워가 결정되는 청와대의 권력구조 속에서는 대단한 ‘힘의 원천’이었다. 다른 수석들도 매일 아침 박 수석의 입을 통해 DJ의 ‘기상도’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김 실장이 이를 그냥 놔둘리 없었다. 김 실장은 어느날 수석회의 석상에서 박 수석의 관저 출근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이 사적인 정보라인을 두면 안 된다. 정보가 없던 시절에는 몰라도 지금은 공식 정보조차 소화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야당시절이 아니다”고 제동을 걸었다. 당시 청와대 한 수석비서관은 “김 실장의 견제가 심해지자 한때 박 수석이 2주정도 관저출입을 자제한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김실장은 특히 ‘부자(父子)도 나누지 못하는’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다. 30여년간 DJ를 모셨던 가신들은 정부출범 3개월도 안돼 점차 청와대와의 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서실장 중심의 청와대 비서진 개편부터가 당초부터 친인척 및 동교동계의 ‘접근 불가’를 겨냥한 것이었다.

김 실장의 후견인은 물론 DJ였다. DJ는 동교동 가신들에게 “모든 것은 김 실장과 상의하라”고 여러차례 지시했다.

김 실장에 대한 DJ의 전폭적인 신뢰에 대해 동교동계의 한 핵심관계자는 “야당시절 수족처럼 부리기만 했던 가신(家臣)들에 둘러싸여 있던 DJ로서는 구여권 출신으로 빈틈없고 치밀하면서도 시스템에게 입각해 입맛에 맞도록 보좌하는 김 실장에게 빠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동교동계 인사들의 입에서는 “DJ 앞에서는 ‘천사’지만 집무실 문을 나서면 ‘악마’같이 변한다”는 비난까지 쏟아졌다.

여기에다 적어도 정권 초기까지 DJ는 아들들의 국정개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이는 거꾸로 김 실장 체제를 공고히 해준 측면도 컸다.

동교동계에 대해 철저히 거리를 유지했던 김 실장은 김홍일(金弘一) 홍업(弘業) 두 아들에 대해서는 깍듯이 예우를 갖췄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동교동계가 인사청탁을 하면 대부분 거절했지만 아들들이 부탁을 하면 10개 중 2, 3개 정도는 들어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교동계가 민원통로의 역할을 상실하자 자신들에게 몰려드는 수백명의 인사청탁자들에게 시달리기 시작한 아들들의 불만도 점점 커져갔다.

98년 5월 어느날 DJ의 아들들과 가까운 한 인사가 김 실장에게 은밀히 메시지를 보내 “DJ의 주변사람들이 취직 안시켜준다고 아우성을 치고있어 두 아들이 죽을 맛이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김 실장의 답변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인사청탁은 들어주기 어렵고, 친인척 관리상 (홍일 홍업씨와) 밥이나 함께 먹겠다”는 것이었다.

김 실장체제는 인사를 둘러싼 동교동계와 두 아들의 불만에 부닥치면서 시간이 갈수록 흔들리기 시작한다.

▼DJ와 김중권의 인연▼

DJ와 김중권 비서실장과의 인연은 92년 대선 직전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이던 김씨를 통해 20억원을 대선 격려금으로 전달 받은 데서 시작된다.

다만 DJ는 그 이전부터 김 실장을 눈여겨봐온 것 같다. 김 실장은 92년5월부터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당시 Y 정무비서관과 함께 노 대통령의 대(對) DJ 창구 역할을 맡았다. DJ의 한 측근은 “당시 정무수석실 야당팀장이었던 Y 비서관을 통로로 해 김 실장과 여야관계에 관한 깊숙한 교감을 했었다”며 “김씨는 구여권 인물로는 드물게 야당총재시절 DJ의 자필 휘호까지 받았다”고 전했다.

실제 김 실장도 대선 격려금을 전달하기 위해 DJ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해 대화를 나눈 직후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했다는 후문이다. 한 지인은 김 실장이 “당시 지하서가를 가득 메운 책을 직접 보고 DJ와 대화를 나눈 뒤 훌륭한 정치지도자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술회했다고 전했다.

김 실장이 95년 11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 비자금사건의 와중에서 발생한 ‘20억+α’ 논란과정에서 끝까지 “20억원 이외에 준 돈은 없다”고 DJ를 엄호한 것이 DJ의 그에 대한 신뢰의 결정적인 이유라는 시각도 있다. 현 정부에서 대통령 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김 실장이 당시 검찰의 예비조사과정에서 끝까지 α의 존재를 부인한 것으로 안다”며 “정치권에서는 20억원 이상의 무언가가 건네졌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실장 자신과 DJ의 측근들은 김 실장의 행정경험과 영남출신이란 점이 발탁의 주된 이유였다고 지금도 펄쩍 뛴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기자 최영해 기자

김영식 기자 부형권 기자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기자 김두영 기자

신석호 기자

▽사회부=하종대 기자 이명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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