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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월 9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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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김일영(金一榮·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놓고 한미 간에 대응방식이 달랐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과정이 양국 대통령이 주고받은 문서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비록 외교적인 서한이어서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북한에 대한 보복대응에 대한 의지가 매우 단호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이 예편한 뒤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미국 내 친한(親韓) 인사들의 모임 구성을 추진하고, 제주도에 대규모 목장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사실도 처음 확인됐다”고 말했다.
한국국방연구원 백승주(白承周) 연구위원은 “1950년대의 자료는 특히 귀중하다”며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은 또 하나의 중국이 될 수 있다’며 전투기 해군함정 장거리포의 양도를 주장한 대목은 당시 이 대통령이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덕성여대 유찬열(柳燦烈·정치학과) 교수는 “과거 북한 군사력이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나왔다”고 말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