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평화상 1년 남북관계 현주소 특별대담]

  • 입력 2001년 12월 6일 18시 16분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1년반이 돼가고 있으나 남북관계는 오히려 꼬여드는 양상이다. 특히 9·11 테러사건 이후 강경해지고 있는 미국의 대북(對北) 대응자세는 한반도 안보환경 전반에 찬 기류를 몰고 올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동아일보와 21세기평화재단(이사장 권오기·權五琦 전 통일부총리)은 6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식 연설을 계기로 향후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를 점검하고 전망하는 ‘21세기 평화재단 평화포럼’을 개최했다.

동아일보 광화문사옥 14층 회의실에서 열린 이날 포럼에는 노재봉(盧在鳳) 전 국무총리와 백진현(白珍鉉)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가 참석해 대담을 가졌다.

동아일보 부설 ‘21세기평화재단·평화연구소’는 ‘궁극적 목표는 통일이지만 우선은 평화공존이 먼저’라는 취지 아래 학술 문화사업과 민간교류 등을 통해 한반도의 화합과 번영을 촉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0년 4월 창립된 공익재단이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김대중 대통령은 6일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현재 남북관계가 정체상태에 있다”면서도 “그러나 햇볕정책 외에 대안이 없다”고 기존 대북정책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백진현 교수〓지난해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정말 달라지는 게 아니냐는 기대가 많았고 김 대통령은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북관계는 그때의 기대와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직접적 원인은 역시 돈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한으로서는 김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베를린 선언에서 대규모 경제지원을 할 것처럼 얘기했는데, 이후 전력지원이나 경제지원이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북한체제의 한계에 있습니다. 북한체제의 근본 속성은 수령(首領) 절대주의, 군사 우선 노선, 폐쇄 억압 체제입니다. 이런 체제 자체에 근본적 변화가 없다면 남북관계에도 변화가 오기 어렵습니다. 우리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런 근본적 측면을 도외시하고 너무 성급했던 감이 있습니다.

▽노 전 총리〓김대중 정부 들어 6·15 정상회담까지 갈 수 있었던 남북간 의도의 접점(接點)이 무엇이었던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가장 큰 목적은 체제의 존속과 안전이고 이를 위해 미국 또는 미군의 존재를 한국에서 약화시키거나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국민회의를 해체하고 민주당을 새로 창당하면서 이른바 ‘젊은 피’를 영입해 남북관계에 대한 진보적인 접근 태세를 취했습니다. 그 당시 미군을 ‘평화군’으로 대체한다든가, 보안법을 개폐한다거나 하는 발언들이 여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것이 북한의 본래 의도에 상당히 접합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정상회담으로 연결됐습니다. 김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기념연설에서 국제적 빈부격차를 언급한 데에는 ‘북한의 빈곤문제를 해소시켜야 남북관계도 해결할 수 있다’는 철학이 담긴 것 같습니다.

▽백 교수〓정상회담의 성사 요인이었던 베를린선언은 국내 논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데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과의 협의도 거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제안됐습니다. 이후 경제적 지원이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자 북한은 나름대로 배신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 전 총리〓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제1 우선순위에 두고 모든 것을 남북문제에 초점을 맞춰 진행한 것이 실책의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구조조정을 통한 경제력 향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성과는 외환위기를 극복한 정도에서 그치고, 대북정책도 제대로 진척되지 않으면서 우리의 힘만 약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대북정책을 실현해나갈 힘의 축적을 무시했거나 한국의 힘을 과신 또는 오판한 것입니다.

▽백 교수〓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연다는 현 정부의 의지는 굉장히 강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의지가 있다고 해서 돌파구가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이고 그것을 이뤄낼 정책담당자의 전략입니다. 핵심은 화해세력과 수구세력, 보수와 진보의 편가르기가 아니라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을 이뤄낼 방안과 아이디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노 전 총리〓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현실성과 실질성이 결여된 정책으로 국론분열만 일으키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이념적 원인은 햇볕정책의 기조인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에 북한의 체제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남북관계를 노사대립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민족을 얘기하면서 그 민족이 어떤 형태로 통치돼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또 김 대통령은 북한 통치나 체제 비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과 정책을 조율하면서 우리의 자율성을 어떻게 살려 나가느냐, 우리가 지향하는 체제에 근접하도록 북한을 어떻게 유도하느냐의 문제 등이 전부 팽개쳐진 것입니다. 북한에 현금도 주고 현물도 주면서 이뤄진 것이 1회성 이산가족 상봉 3번밖에 없지 않습니까.

▽백 교수〓한반도 문제는 북한과 협상을 하는 측면,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끌어내는 국내적 측면, 우방국과의 협의를 이끌어내는 국제적 측면이 3중으로 중첩돼 있습니다. 대북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내적, 국제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해 잘 운전해 나가야 합니다. 또 정확한 현실인식 능력, 국제 환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겠다는 것은 대단히 순진한 생각입니다. 남북문제는 야당과 협력하고 국민과도 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북문제가 국내정치에 이용되면서 국내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미국과의 대북정책 조율도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노 전 총리〓북한은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대미관계 개선의 종속변수로 본 반면 남한은 북한을 주요변수로 생각한 측면이 있습니다. 북한이 그나마 교류에 응한 것은 미국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햇볕정책이과연관여(engagement)정책이냐,유화(appeasement)정책이냐 하는 개념 자체도 혼란스럽습니다. 총련에 대한 일본 당국의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테러자금 차단과 무관치 않다는 느낌입니다. 북한이 아랍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북한에서 훈련시킨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백 교수〓햇볕정책의 긍정적인 측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과거보다 논의의 지평이 넓어졌습니다. 노태우 정부 이후 대북정책의 기조였던 포용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너무 국내 정치적 동기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현실성을 결여한 채 한 쪽에 치우친 측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냉전세력과 화해세력으로 나누는 식으로 문제를 호도함으로써 국내적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남북문제는 절대 하루아침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도 그걸 알기에 결국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노 전 총리〓과거 남북문제가 정권유지 차원에서 오용됐던 경우가 많았던 점에 비춰보면 논의의 다원화 다양화 측면에선 환영할 만합니다. 그런데 의견의 다양성을 인정하려면 그 조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안보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과거 김영삼 정부 때도 그랬지만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가 명확치 않습니다. 김 대통령은 흡수통일을 반대한다고 했는데, 북한을 안심시킨다는 의미에서는 이해되지만 그런 선택마저 제거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백 교수〓북한의 체제변화 없이는 남북관계 진전에 본질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통일은 논할 수조차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지 않은 통일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대안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북한과의 협상도 중요하지만 국내적 컨센서스를 모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최근 김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문제에 대해 “단언할 수 없다”고 신중한 자세를 보인 것이나, 대북정책과 관련해 “무리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것은 바람직한 자세라 생각합니다. 대북정책의 핵심은 북한의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고 장기간에 걸친 정교한 전략을 통해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으로 남은 임기를 마치기를 바랍니다.앞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의 반테러전쟁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노 전 총리〓김 대통령은 그동안 김정일의 서울 답방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자세 변화 등 북한으로서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답방은 어렵습니다.

▽백 교수〓과거 아웅산 사건이나 KAL기 폭파사건 때 미국은 한국에 과도한 반응을 자제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테러전쟁이 2단계로 접어들면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 전 총리〓지금까지는 핵과 미사일 생화학무기를 거론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환경을 맞게 됐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핵과 미사일은 우리 문제가 아닌 미국의 문제라고 얘기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한반도 평화문제를 얘기할 때 이를 뒤로 미룰 수 없고, 전면적으로 검토해야 할 상황에 당도했다고 봅니다.

<정리〓이철희·김영식기자>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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