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이산상봉]코엑스-고려호텔 상봉장 표정

  • 입력 2000년 8월 15일 19시 22분


《“오마니! 제가 왔어요.” “아들아! 살아 있었구나.” “여보…, 미안하오.” 울고 또 울었다. 분단 반세기만에 서울과 평양에서 해후한 이산가족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서로 얼굴을 어루만지며 살아서 만남을 기뻐하면서 세월의 무상함에 한숨짓기도 했다. 서울 코엑스와 평양 고려호텔에서 있은 남북 이산가족방문단의 극적인 상봉 모습을 소개한다. 》

▼서울에서▼

○… “넌 누구니?” 북에서 온 백기택씨(68)는 상봉장에서 기다리던 문옥씨(67) 등 여동생 3명과 부둥켜안은 채 한참동안 오열한 뒤 구석에 있던 낯선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

“오빠가 의용군에 입대한 뒤 태어난 오빠 딸이야, 오빠 딸” 유복자라는 이유로 외가에 입적돼 호적상으로는 백씨의 조카로 돼있는 딸 신금옥씨(50)가 그동안 맺힌 한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 품에 안겨 통곡하자 또다시 주변은 울음바다가 됐다.

“아버지 저 금옥이에요, 아버지 딸…” 자신도 모르는 딸이 있었다는 사실에 백씨는 한동안 숨이 멎은 듯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남쪽 가족들은 백씨가 18세에 인민군에 입대한 뒤 소식이 끊겨 죽은 줄만 알고 20년 전부터 제사까지 지냈으나 정작 백씨는 북한에서 축산과 채소 생산에 눈부신 성과를 거둬 북한 최고영예인 ‘노력영웅’칭호까지 얻었다.

○…북측 이산가족 원용국씨(71)의 여동생 순녀씨(66)는 오빠를 만난 후 10여분이 지나도록 계속 ‘오빠’를 부르짖으며 오열.

순녀씨가 워낙 하염없이 울자 순녀씨와 함께 온 사촌 용환, 용하씨 등은 순녀씨에게 ‘이제 그만 하라’고 달래는 모습. 하지만 한번 터진 순녀씨의 눈물이 그칠 줄을 몰라 이들은 한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하기도.

○…두 형제가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다 6·25전쟁 때 생이별한 양원열씨(69)는 형 진열씨(82)를 만나자마자 “형님, 저 이렇게 건강하게 내려 왔습니다”며 훌쩍 늙어버린 형님의 손을 한동안 꼭 잡고 눈물을 글썽.

원열씨는 “내가 북한에 살고 있는지 정말 몰랐느냐”고 다소 의아해 하면서도 “그 많은 이산가족 중에 1차로 오지 않았느냐”며 가족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7남매의 막내로 상봉가족 제한 숫자인 5명에 끼지 못한 방한선씨(50·여)는 북에서 내려온 오빠 방환기씨(66)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보고자 코엑스 상봉장 입구에서 오빠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기다리기도.

방씨는 사진에서만 보던 오빠를 알아보고 이름을 외쳤지만 오빠가 한번 훑어보기만 한 채 그냥 지나쳤다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북한의 주체섬유 비날론 개발자인 이승기박사의 부인으로 북측 방문단 중 최고령자로 눈길을 모았던 황의분씨(84)는 이날 비교적 담담한 모습.

한동안 재회의 감격에 말문을 열지 못하던 황씨는 곧 진정을 찾고 올케인 강순악씨(85), 조카 황옥연(64) 보연씨(62) 등 가족들과 “보고싶었다”며 일일이 인사.

취재진이 “연세가 가장 많은데도 곱다는 말이 많다”고 말을 걸자 황씨는 “쑥스럽지 뭐”라며 응수하기도.

조카 보연씨는 “사촌들 소식이 제일 궁금해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고모가 상상했던 것보다 정정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이승기박사는 해방 후 서울대 공대 학장을 지내다 6·25전쟁 때 월북해 북한에서 합성섬유 비날론을 개발했다.

○…“50년 만에 헤어졌던 큰형을 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상봉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떠나시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북에서 온 박노창씨(69)는 50년 전에 헤어진 큰형 원길씨(89·서울 은평구 신사동)가 이틀 전 숨진 사실을 상봉장에 나온 조카들로부터 전해 듣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노창씨는 지난달만 해도 6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고 통보된 큰형이 이날 오전 신촌세브란스병원 영안실을 떠나 장지인 경기 파주시 금촌면으로 향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믿을 수 없다”며 울음을 터뜨렸다.6월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오던 원길씨는 7일 의식을 잃고 쓰러져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13일 오전 5시반경 숨졌다.

○…북측 이산가족 방문자인 최필순씨(77)는 일곱살과 한살 때 각각 헤어진 딸과 아들을 붙잡고 통곡.

이 가운데 아들 중선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50년 만에 처음 불러본다. 사실 그 동안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아버지를 만나 너무 반갑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씨의 딸도 “반세기만에 아버지를 만난 이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며 통곡. 상봉장에 나온 원길씨의 조카 성규씨(54)는 “큰아버지가 작은아버지의 생존소식을 들으신 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면서 ‘조금만 더 살아 반드시 동생 얼굴을 봐야겠다’고 하셨다”며 울먹였다.

○… “아버지 저 재혁이에요. 저 몰라보시겠어요. 제가 바로 50년 전 아버님 곁을 떠났던 셋째 재혁입니다.”

북측 방문단 임재혁씨(66)는 50년 만에 만난 아버지 임휘경씨(90·서울 양천구 목동)를 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반세기만에 찾아와 엎드려 절을 드렸지만 눈앞의 아버지는 치매를 앓아 휠체어에 의지한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 형 창혁씨(71)는 “네가 징집됐다는 소식을 듣고 의용군들이 모여있다는 혜화국민학교로 찾아갔었어. 사방을 뒤지고 다녔지만 너를 찾을 수가 없었지”라며 동생을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춘희야, 남희야. 이게 얼마 만이냐. 정녕 50년만이냐. 50년 세월이다.” “오빠….”

북한 최고의 인민화가로 활동중인 정창모씨(68)와 여동생 춘희(61·경기 군포시) 남희씨(53·전주시 효자동)는 지난 50년간 생이별의 아픔을 눈물로 씻으려는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오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감싸 안고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부벼대며 ‘혈육의 정’을 확인.

남희씨는 오빠의 손을 꼭 잡고 “10년전 아는 사람이 미국에 갔다가 ‘평양’이란 잡지를 갖고 왔는데 그 책에서 오빠가 가족에 대해 쓴 20여쪽의 기사를 보고 살아계신 것을 알았다”면서 “오빠, 이렇게 살아계셔서 고마워요”라고 눈물을 흘렸다.

창모씨는 여동생 춘희씨가 “어머니는 오빠를 잃은 고통에 하루도 맘 편히 사신 날이 없었다”며 부모님의 손때가 묻은 문갑과 화분을 건네자 받아들고는 얼굴을 감싸쥐며 오열.

창모씨는 “50년 세월이 원망스럽다”면서 연거푸 ‘반세기의 생이별’을 한탄하면서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더란 말이냐. 아들이 이렇게 왔는데…”라며 눈물을 쏟았다.

창모씨는 6·25전쟁 당시 전주북중 5학년(19세)으로 의용군에 입대, 월북했으며 76년 김일성 주석의 집무실인 금수산의사당(현 금수산기념궁전)에 비치된 ‘비봉폭포의 가을’을 완성, 김주석과 김정일 노동당총비서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창모씨는 77년 공훈예술가, 88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작품 100여점은 북한의 국보로 평가받고 있다.

▼평양에서▼

혈육의 상봉은 평양에서도 뜨거웠다. 그러나 이산의 세월은 길고 상봉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15일 평양의 단체상봉장인 고려호텔에는 북측 가족들이 상봉예정시간(오후 5시)보다 30분쯤 앞서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남편 최경길씨(78)가 북의 아내 송옥순씨(75)와 아들 의관(55), 딸 의실씨(53)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상봉이 이뤄지자 상봉장은 금세 눈물바다로 변했다.

○…“허리가 너무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만나러 왔어.” 척추질환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어렵사리 평양땅을 밟은 김금자씨(69)는 상봉장에서 사촌언니 금도씨(72) 등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하면서 울부짖었다. 단지 허리가 아파서만은 아닌 듯했다.

“아픈데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사촌들도 흐느꼈다. 하지만 김씨는 꿈에도 그리던 오빠 이후씨(71)는 끝내 만나지 못했다.

오빠가 고혈압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김씨는 “나는 이렇게 왔는데…” 하며 또다시 오열했다. 건강진단 결과 ‘여행불가’ 판정을 받았음에도 굳이 우겨 평양땅을 밟은 김씨였다.

○…“1·4후퇴때 100일만 피란가 있으라고 해 피란갔다 이제야 돌아왔어요. 이럴줄 알았다면 누나 말을 듣지 않았을텐데….”

한때 고혈압으로 여행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방문단에 포함된 김상현씨(62)는 누나 상월씨(70)를 만나 이렇게 원망했다. 자신을 업어키운 누나에 대해 환갑을 넘긴 ‘철없는 동생’의 애절한 ‘어리광’이었다. 그는 “아홉살 때처럼 누님에게 그냥 안겨보고 싶은 것이 꿈에도 그리던 소망이었다”며 “이제 소원을 풀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제 얼굴을 몰라볼까봐 점을 빼지 못했어요.” 남에서 온 아버지 이재경씨(80)의 품에 안긴 북의 딸 경애씨(52)는 자신의 왼쪽 뺨에 난 커다란 점을 가리키며 울먹였다.

젖먹이 때 헤어져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함께 배어 있었다.

○…이덕연씨(74)는 헤어질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북의 아들 관열씨(52)가 양복에 훈장을 가득 달고 나타나자 처음엔 다소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관열씨가 “국기1급 노력훈장 등 무려 16개의 훈장을 받았다”며 자랑하자 이씨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생 많았겠구나”라고 격려했다. 이씨의 아내 신순녀씨(72)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김일선씨(81)는 북의 아내 오상현씨(77)가 자신의 가슴에 파묻혀 “여보, 그동안 속절없이 살았시오. 우린 이제 어찌합니까”라고 울부짖자 오열하면서 연방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채성신씨(73)는 아홉살 때 헤어진 북의 동생 정열씨(62)를 만나자 “눈매 등이 아버지를 쏙닮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며 뜨겁게 포옹했다.

○…이산가족 부부인 이선행 이송자씨 부부는 나란히 방북길에 올라 잃어버린 혈육과 상봉했다. 두 사람은 전쟁통에 각각 북쪽의 아내 남편과 헤어져 이산가족이 되자 남쪽에서 만나 재혼했다.

이선행씨는 북의 아내와 만났고 이송자씨는 북의 아들과 만났다. 이들 부부는 이번에 만난 각자의 이산가족을 16일 상봉자리에서 서로 소개해주기로 했다.

○…남측 방문자 중 최고령자인 김정호씨(91)는 1·4후퇴 때 북녘땅에 두고온 외아들 덕순씨(60)를 만났다.

김씨는 주름이 가득한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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