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시간표 없음… 슬리퍼 신고 1명 와도 영화 즉시 틀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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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고시촌 단편영화관 ‘자체휴강 시네마’ 문 연 박래경 대표

“영화를 만들어 놓고 상영관을 구하지 못한 감독이 있다면 연락주세요.” 박래경 ‘자체휴강 시네마’ 대표는 영화 관람료의 절반을 단편영화 제작자에게
돌려주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영화를 만들어 놓고 상영관을 구하지 못한 감독이 있다면 연락주세요.” 박래경 ‘자체휴강 시네마’ 대표는 영화 관람료의 절반을 단편영화 제작자에게 돌려주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신림동 고시촌’이라 불리는 서울 관악구 신림로. 식당과 술집, 원룸텔이 즐비한 상가 단지의 한 건물 구석에 지하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이 보였다. 계단 입구에는 ‘자체휴강 시네마’라고 적힌 검은색 간판이 달려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여니 팝콘을 튀기는 작은 대기실과 상영관이 나왔다. 극장이었다.

“처음 오는 손님들은 DVD방으로 알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엄연한 극장입니다. 단편영화만 상영하는 단편영화관이죠.”

이 극장의 주인, 박래경 ‘자체휴강 시네마’ 대표(30)의 말이다. 인근에 사는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만은 몸과 마음을 제대로 쉬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자체휴강’이란 이름을 달았다. 올해 1월 문을 연 이 극장은 최근 국내의 한 도시문화콘텐츠 미디어가 신림동의 가볼 만한 곳으로 소개하며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고시촌에 있다 보니 근처에 사는 1인 가구 손님이 많이 오세요. 한 분이더라도 영화를 틀어주고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곧바로 열 명의 손님이 와도 입장 안 시키니 부담 없이 오시죠. 대형 극장과 달리 분위기가 오붓해 커플도 많이 옵니다.”

극장을 차리기 전까지 그는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평범한 대학원생이었다. 대학원에서 시나리오를 공부하던 그는 무수히 많은 단편영화가 상영관을 찾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봤다. 현재 국내의 단편영화관은 ‘자체휴강 시네마’를 포함해 이태원의 ‘극장판’, 춘천의 ‘일시정지 시네마’ 정도가 전부다.

“잘 만든 단편영화가 참 많아요. 그런데 이런 작품들이 상영관이 없어서 연출가들의 한 줄짜리 경력으로 남고 사라지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영화는 책이나 음악과 달리 무료로 체험할 기회가 적다. 책은 서점에서 읽을 수 있고 음원사이트나 유튜브를 통해 부분적이나마 무료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영화를 상영하려면 스크린, 영사기, 스피커와 이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유료로 운영된다. 그리고 많은 극장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상업영화에 상영관을 내어준다.

대학원 수료를 앞둔 올 1월. 그는 단편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는 극장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비용은 학생 때 살던 집의 보증금을 빼 채웠다. 극장 위치는 신림동 고시촌으로 정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옷 챙겨 입고 멀티플렉스 가자는 말로 생각하더라고요. ‘추리닝’ 입고 슬리퍼 끌고 편하게 들러 영화 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했어요. 수요층이 어디에 많이 살까 생각했더니 고시생, 사회 초년생 등 1인 가구가 몰려 있는 신림동 고시촌이었죠. 다행히 주위에 멀티플렉스도 없고요.”

영화 관람료는 2000원이다. 2000원을 내면 20∼30분짜리 단편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다. 손님이 오는 즉시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한가한 시간을 고르면 120인치 스크린이 달린 8석 규모의 상영관을 독차지할 수 있다.

영화 관람료 중 절반은 배급사를 통해 단편영화 감독에게 돌려준다. 작게나마 단편영화 연출자들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손님이 많이 늘어 돈을 벌면 30, 40석 규모로 극장을 키우는 게 목표다.

“단편영화는 신(scene)을 허투루 쓰지 않는 고농축 콘텐츠입니다. 장편영화가 아메리카노라면 단편영화는 에스프레소인 셈이죠. 극장에서 단편영화 한번 즐겨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단편영화 감독 중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나올지.”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신림동 고시촌 단편영화관#자체휴강 시네마#박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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