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5년 12월 26일 03시 0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빨리 준비해! 이미 늦었다.”
24일 오전 10시, 30년 전부터 정신장애를 앓아온 이정형(가명·67·서울 노원구 중계동) 씨는 동생 영형(가명·63) 씨를 재촉했다. 빨간색 모자에 빨간색 바지, 그리고 턱 밑에 덥수룩한 하얀 수염이 어색한지 영형 씨는 거울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영형 씨 역시 2급 정신장애인. 40년 전 군에 다녀온 동생이 정신질환을 호소한 뒤 동생을 돌보던 정형 씨도 정신장애를 얻게 됐다.
이들이 외출 준비에 부산을 떤 이유는 30년 만의 크리스마스 외출이기 때문.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집을 나서는 이들의 발걸음은 하늘을 날 듯 가벼웠다.
크리스마스 때면 남의 집 잔치처럼 TV로만 경험했던 이들 형제가 외출을 결심한 것은 국제산타클로스협회 한국지부인 한국산타클로스협회에서 개최한 첫 산타축제에 참가하자는 평화종합복지관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날 같은 복지관에 있는 장애인 20명과 노인 35명, 새터민(남한 정착 탈북자) 21명도 함께 축제에 참가했다.
오후 1시 반 축제 장소인 경기 과천시 서울랜드 앞에는 정형 씨 형제처럼 산타 복장을 한 700여 명의 참가자가 모여 있었다. 오후 2시 축제가 시작되자 700여 명의 산타클로스가 놀이공원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날 축제에 참가한 새터민 이금녀(李金女·49·여) 씨도 덩달아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 오랜만에 마음껏 웃고 떠들며 축제 분위기를 만끽했다.
1년 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탈북한 그는 이날 딸(20)과 함께 축제에 참가했다.
특히 같은 평화복지관 소속 노인 10여 명이 한국산타클로스협회에서 연 자선공연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풍물 실력을 뽐내자 이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어깨춤을 췄다.
이 씨는 “남한으로 넘어 온 뒤에는 각자 일하느라 바빠 가족들끼리도 모일 기회가 거의 없어 연말이 되면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며 “이런 행사를 통해 딸과 함께 공연을 보니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2년 전 탈북한 최옥순(崔玉順·63·여) 씨도 “이번이 남한에서 맞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인데 산타 복장을 하니 기분이 더 새롭다”며 “특히 다른 새터민들과 함께 놀이기구도 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평화복지관 송민철(33) 사회복지사는 “처음에는 날씨가 추워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매년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