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서 46년 가방수선 박태동씨의 대선맞이

  • 입력 2002년 12월 16일 16시 17분


서울 신촌 로터리 한 골목에서 가방 수선을 하는 박태동(朴台東·67·사진)씨가 대통령선거를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어다닐 수조차 없는 진흙탕이어서 '진촌'이라고 불렸던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46년.

전남 구례에서 1956년 무작정 상경해 이북 사람이 하는 가방공장에서 기술을 익혀 말씨도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박씨는 지금까지 대통령 선거를 한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박씨는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이 56년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 열차 안에서 별세했을 때를 뚜렷이 기억한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61년 5·16 군사혁명과 71년 김대중(金大中) 현 대통령과의 치열했던 대결. 그리고 이후 찾아온 군사독재까지.

0.7평 크기의 터에 판자로 얼기설기 막아 놓은 공간이 박씨의 작업장이다. 40년 전 남대문시장에서 산 영국제 중고 미싱과 손때 묻은 공구들을 가지고 숱한 가방을 고쳐왔다.

"교복 자율화 이전에 학생들이 지정 가방을 들고 다닐 때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밤을 새워가며 가방을 고쳤어요. 학생들이 학교 못간다고 울면서 기다리곤 했지요."

가방공장에서 만난 부인(66)과 함께 일하면서 두 아들과 딸을 키웠다. 저녁 11시가 다 돼서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는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굶은 채 자고 있었다. 공동 우물에 가서 물을 떠와 졸린 아이들을 깨워 라면을 끓여 먹이곤 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면서 박씨의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군사 독재가 심해지면서 신촌 일대는 최류탄으로 덮이는 날이 계속됐다. 노점상 단속도 심해져 서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날도 많아졌다. 그리고 90년대가 됐다.

"벌이는 시원치 않았지만 투표는 의무다 생각하고 꼭 투표를 했어요. 내 비록 밥은 굶을지언정 세금은 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갈수록 대학생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쉽지요."

87년 대선 이후 대선 때마다 마음 속에 담아둔 사람을 계속 선택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몇가지 실정을 한 것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자식들은 그동안 잘 커줬다. 두 아들은 어엿한 직장을 갖고 있는 가장이 됐고 딸은 미국 조지아주에서 잘 살고 있다. 손가락에 얼음이 박히는 추위를 맞으면서 가방을 고치고 있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대통령이 될 분은 이 골목에 직접 내려와서 우리 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좀 봐줬으면 좋겠어요. 국민들을 잘 살피는 사람을 찍으렵니다."

학창 시절 박씨에게서 가방을 고쳤던 인근 연세대 학생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또 가방을 고치러 오기도 한다.

박씨는 "도저히 몸이 힘들어서 못 일어날 때까지 일을 해야지요"라며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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