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거리」인 서울 종로구 대학로 언덕빼기에 가지런히 솟은 동숭아트센터. 연극 음악 무용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예술」에 목말라 있는 젊은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동숭이 자체 기획한 창작극 「어머니」(96년)와 「나, 김수임」(97년)은 불황에 허덕이던 연극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영화 마니아들은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숭시네마텍에 둥지를 틀었고….
동숭아트센터 김옥랑대표는 과감한 투자와 앞을 내다보는 공연기획으로 80,90년대 문화 흐름의 중심을 지켜온 인물. 그러나 이 「문화계 여걸」 뒤에는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은 「숨은 주역」이 따로 있다.
국내 목재 합판 및 가구업계의 간판 경영인인 동화기업 승상배총회장(76). 그는 지금까지 부인의 문화 사업비를 마련해 주는 「돈많은 남편」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김씨가 지난 84년 꼭두극단 낭랑을 창단한 이후 갖가지 의욕적인 사업으로 문화인들의 주목을 받는 동안 연평균 7억원대의 적자는 고스란히 승총회장 몫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 돈버는 일에만 익숙한 원로기업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엔 작은 규모로 시작했는데 갈수록 씀씀이가 커지더라고요. 기왕 돕기로 나선 마당에 중간에서 발을 빼자니 아내 체면이 말이 아니겠고…. 우리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계속 끌려왔습니다, 그려. 허허허』
부부는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문화와 인연을 맺어온 셈. 대개의 경우 김씨가 조리있게 설득하면 승총회장은 못이기는 체 부인의 신규 프로젝트를 지원해주는 양상이었다는게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뒷전에만 머물러 있던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문화계 감투를 쓰게 된다. 김씨가 국내 영상예술의 기초를 다질 요량으로 99년경 세울 계획인 동숭영상대학원과 예술대학의 이사장을 맡기로 한 것. 승총회장은 『줄잡아 1백억원은 넘게 들어갈텐데 어떻게 조달할지 걱정』이라면서도 『돈보다 소중한 건 바로 정신적인 지원』이라고 강조했다.
〈박원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