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李會昌대통령후보는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집권당대표를 거쳐 21일 마침내 3부를 통할하는 국가원수직에 도전할 기회를 맞았다.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매가 「간단치 않은」 인물임을 첫 눈에 심어준 李후보의 왜소한 체구에서 국민들은 새삼 강단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쪽」과 「법대로」의 길을 걸어온 끝에 화려한 경력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를 시작한 셈이다.
그의 강한 의지와 결단력은 검사인 부친과 가톨릭 집안이라는 가족사속에서 생래적으로 습득되었을 뿐 아니라 반평생 육법전서를 토대로 사물의 옳고 그름을 심판하던 법관으로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형성됐다.
李후보는 1935년 6월2일 황해도 서흥에서 부친 李弘圭옹(93)과 모친 金四純여사(86)의 4남1녀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황해도지만 집안은 16대조부가 충남 예산으로 내려온후 그곳에 대대로 살아, 뿌리로 치면 충청도 사람이다.
부친은 서울법대 전신인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해방직후 대쪽검사로 이름을 날린 검사였다.
한때 소신판결 때문에 좌익으로 모함을 받아 정부수립후 구속검사 1호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대쪽과 소신으로 묘사되는 李후보의 품성은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로마시대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더불어 부친을 꼽고 있는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李후보는 학창시절을 부친의 임지를 따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보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서중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해 부친이 청주지검으 옮겨 청주중학에 입학했다.
이듬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 2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는 경기중시절 변론반에 들어 웅변에 심취했다.
당시 서울법대 학생회가 주최한 전국학생 변론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정치권에 진입한 이후 그는 학창시절의 웅변실력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기고를 거쳐 서울법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 4학년때인 56년 고시 사법과에 합격, 공군법무관으로 3년간 복무한후 대위로 제대했다.
그리고 4.19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60년3월 서울지법 인천지원 판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초임 판사시절인 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해 7월 혁명재판소 재판관으로 차출됐다.
李후보는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서울지법 판사중 연소자순으로 뽑았기 때문에 나이가 어려 차출됐다』고 회고하고 있다.
서울지법판사 서울고법판사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을 거쳐 李후보는 81년 46세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대법원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소수의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쪽」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것도 대법원 시절 소수의견을 많이 낸데서 연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정권 시절 수사기관의 무리한 영장청구를 여러 차례 기각시키는 등 그가 대법관 시절 기록한 소수 의견은 신념에 위배되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용기나 결단력의 면모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는 또 「학구파 판사」로 법조계에 소문이 나있다.
법관으로 첫 기관장을 맡았던 영등포 지원장 시절 법률전문도서를 수백권 구입해 도서실에 비치하고 후배 법조인들과 매월 판례 연구발표회를 가졌다.
그때 후배 법관들은 당시 베스트셀러이던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책속에 나오는 「킹스필드」교수를 본떠 李후보에게 「李스필드」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李후보는 86년 대법원 판사에서 물러난 후 2년3개월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고 88년 6공 출범초 만들어진 민주화합추진위(민화위)에 재야법조인 자격으로 참여해 민주발전분과위에서 활동했다.
6공 출범 당시 광주민주화 운동 등 과거의 불화와 반목, 증오와 대립으로 인한 국민정서의 혼돈 속에서 과거 응어리를 풀어야 한다는 국민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사흘간의 고뇌끝에 민화위에 참여했다.
88년 대법관으로 다시 임명되면서 동시에 중앙선관위 위원장을 맡았다.
재임동안 동해시와 영등포乙 보궐선거를 치렀다.
불법타락선거를 막기 위해 후보와 정당지도자들에게 불법을 경고하고 고발조처까지 하는 단호한 면모를 보였다.
영등포乙 선거가 끝난 두달 뒤 선거관리최고 책임자로서 불법선거를 제대로 막지 못한데 대해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로써 사의를 표명하고 중앙선관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중앙선관위원장을 거치면서 법조계내에서만 머물던 그의 「대쪽」이미지는 대중속에 각인되게 됐다.
그해 그는 몇몇 언론사에 의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고 세인들에게 그의 존재는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문민정부 출범이후 金泳三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으로 발탁돼 다시 언론의 주목인물로 부상했다.
감사원장 재임동안 성역없는 사정을 진두지휘, 감사원의 위상을 높였다.
이어 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그러나 총리의 내각총괄과 정책조정의 역할을 제고하는데 주력하다 청와대와 갈등을 빚어 1백27일만에 총리직을 내던졌다.
역설적이지만 金대통령과 李후보가 「결별」하는 것을 기점으로 치솟기만 하던 현정부의 인기는 급락했고, 李후보는 「대쪽총리」라는 별명을 얻으며 대중적 인기를 받았다.
이로 인해 96년 4.11총선을 앞두고 여권이 위기에 처하자 金대통령은 李후보를 다시 필요로 했고 그는 신한국당에 전격적으로 입당, 총선기간 중앙선대위의장을 맡으며 선거를 신한국당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후 혈혈단신으로 정치권에 몸을 던졌지만 李후보를 정점으로 정치권의 새로운 변화를 일궈내려는 정치적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형성하면서 그는 마침내 집권당사상 첫 완전자유경선에서 승리를 안았다.
李후보는 선배 법관의 소개로 부인 韓仁玉여사(59)와 지난 61년 만나 중매반 연애반으로 이듬해 결혼했다.
韓여사는 경기여고,서울대 가정학과를 졸업했고 韓成洙전대법관의 딸로 같은 법조인 집안출신이다. 韓여사와 2남1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