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함께했지만 찾을 순 없는 존재… 인류에 방패이자 괴물, 거인[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7월 13일 23시 00분


인간이 거인을 만들어 온 이유

인간은 권력과 신성, 공포를 상징하는 존재를 실제보다 크게 표현하며 ‘거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년) 초판 표제 판화 중 일부. 왕관을 쓴 거인의 몸은 수백 명의 작은 사람들로 이뤄져 국가를 상징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인간은 권력과 신성, 공포를 상징하는 존재를 실제보다 크게 표현하며 ‘거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년) 초판 표제 판화 중 일부. 왕관을 쓴 거인의 몸은 수백 명의 작은 사람들로 이뤄져 국가를 상징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거인’에 대해 듣고 ‘거인’을 보며 자랐다. 용과 같은 괴물과 달리 거인은 넘볼 수 없는 크기로 표현되지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 모습에 자신들의 다양한 바람을 투영했다. 성경의 네피림과 골리앗, 지난해 국내 극장가를 강타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까지…. 인류의 역사는 거인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신화나 설화 속 초거대 인류의 뼈는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실존하지 않았는데도 왜 동서고금에는 거인에 대한 이야기와 유물이 넘쳐날까.

암각화 속 크기로 드러낸 지위

고구려 수산리 벽화묘의 행렬도에서 주인은 시종보다 크게 묘사됐다. 사진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고구려 수산리 벽화묘의 행렬도에서 주인은 시종보다 크게 묘사됐다. 사진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고대 그림에서 인물의 크기는 신장이 아니라 서열순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크게 그리는 방식으로, 위계적 비례라고도 한다.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의 접객도나 수산총의 행렬도에는 어떤 특징이 있다. 주인과 손님 곁의 하인들은 작게 그려졌다. 이런 현상은 세계에서 공통적이다. 이집트 문명의 초기 대표작인 이집트 제1왕조 나르메르 팔레트에도 왕은 크고, 신하는 중간이며, 적군은 발밑에서 자잘하게 짓밟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불상이나 탱화에서 본존 주변의 협시보살이 작게 묘사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중국에서도 거인의 모습을 한 3000년 전의 신상이 쓰촨성 싼싱두이(三星堆) 유적에서 발견됐다. 이 유적에선 높이 2.6m의 청동신상이 발굴됐다. 청동상의 시선은 관람자의 눈높이보다 한참 위에 있어 마치 박물관 관람객을 압도하는 듯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런 비대칭적인 크기를 보면서도 크게 불편하거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크게 생각하려는 문화적으로 학습된 시각문법이 장착돼 있기 때문이다.

이 거인의 문법은 선사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알타이의 추야강 강변에 있는 대표적인 암각화 유적 칼박타시에는 중심 제단 역할을 하는 커다란 바위에 버섯 모양 모자를 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 한가운데 거인이 있고, 그 머리 위로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있다. 족장이나 샤먼이 집단을 대표해 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장면은 유라시아 암각화 곳곳에서 확인된다. 카자흐스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탐갈리 암각화에도 머리에서 빛이 뻗어 나오는 거대한 인물 아래 작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렇듯 인간은 지난 수천 년간 높은 지위와 힘을 지닌 존재를 거인으로 표현해 왔다.

미지에 대한 공포가 만든 거인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 때 거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중국 역사서 ‘한서’ 오행지에는 진시황 26년 서쪽 변경인 임조(臨洮)에 키가 5장(약 11.5m)이고 발이 6척(약 1.4m)인 이민족 복장의 거인 12명이 출현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민족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요소였다. 천하를 통일한 해에 진시황은 천하의 병기를 거둬 녹이고, 그것으로 열두 거인의 형상을 본뜬 청동상을 주조해 수도 함양에 세웠다.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미지에 대한 공포는 거인을 만든다. 16세기에 남아메리카 남단에 기착한 스페인의 마젤란 함대는 그곳 원주민을 거인이라 기록했고, 그 땅을 ‘거인의 땅’이란 뜻의 파타고니아로 명명했다. 훗날 밝혀진 원주민 테우엘체인의 평균 신장은 180cm 안팎. 큰 편이긴 했지만 거인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유럽 선원의 키가 160cm대였으니, 20cm의 키 차이가 항해기 속에서 거인으로 부풀려졌다. 진시황의 열두 거인이 오랑캐의 옷을 입고 있었듯, 거인은 대개 국경 너머에서 온다.

거인 설화에 불을 지핀 것은 대형 포유류의 화석이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영웅과 거인의 유골이라며 신전에 뼈를 모셔 두곤 했다. 고전학자 에이드리엔 메이어는 그 뼈들이 실은 마스토돈이나 매머드 같은 대형 포유류의 화석이었으리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거인의 뼈는 분명히 있었다. 사람의 뼈가 아니었을 뿐이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거인왕

이집트 제1왕조 초대 파라오인 나르메르를 신하와 적군보다 크게 묘사한 석판. 사진 출처 영국박물관
이집트 제1왕조 초대 파라오인 나르메르를 신하와 적군보다 크게 묘사한 석판. 사진 출처 영국박물관
우리 역사에도 왕이나 영웅을 묘사할 때 거인이 흔히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의 키가 9척이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키가 11척이나 됐다고 기록돼 있다. 때로는 거인 영웅이 등장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를 도와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베는 9척 장신의 괴유(怪由)가 등장한다. ‘척’은 대체로 한나라 때는 23cm, 당나라 때에는 약 30cm였으니 신장이 11척이면 2.5∼3.3m가 되는 셈이다. 신라는 왕권의 상징으로 거대한 거인상을 세우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인도의 아육왕(아소카왕)이 석가삼존상을 만들다 실패하고 바다로 떠나보낸 금과 철을 신라에서 받아 진흥왕 35년(574년)에 약 5m 높이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황룡사에 모셨다고 한다. 실제 황룡사에는 그 불상이 올려졌던 돌 대좌가 남아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이 정도 신장의 인골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 중 가장 장신은 17세기 조선시대 무관 남오성으로, 사망 당시 키는 190cm로 추정된다. 신라에서는 탑동에서 180cm에 가까운 장신 인골이 발견된 정도다. 인골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 관의 크기로 시신의 크기를 추정하는데, 그렇더라도 2m가 넘는 장신의 흔적은 없다.

해외에서 인골의 신장이 2m 이상인 사례는 있다. 1991년 이탈리아 로마 근교에서 발굴된 16∼20세 남성의 인골은 추정 신장이 202cm였다. 뇌하수체에 이상 흔적이 남아 있어 거인증을 앓다가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실제 거인이 존재하긴 했지만 매우 드물었다. 애초에 9척과 11척이라는 기록은 실제 측정치가 아니라 ‘위대한 왕이나 장군은 크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다.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거인 서사

현대에도 거인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필자 세대가 올려다본 거인은 ‘로보트 태권V’나 ‘마징가 Z’ 같은 로봇이었다. 가슴이나 머리에 조종석이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앉아 조종하는 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도 인류가 높은 벽을 쌓고 그 안에 숨어 살며 벽 밖에는 거인이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최근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영화 ‘호프’에서도 우주인은 휴전선 밖의 거대한 거인처럼 묘사된다.

거인은 실존하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존재다. 1651년 토머스 홉스의 고전 ‘리바이어던’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의 명성에는 프랑스 예술가 아브라함 보스가 새긴 표제 판화가 한몫했는데, 왕관을 쓴 거인이 산 너머에서 도시를 굽어보는 모습이다. 이 거인은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주교의 지팡이를 쥐고 있어 거대한 권력을 상징한다.

리바이어던은 성경 욥기에 등장하는 괴물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홉스의 뜻은 정반대였다. 자연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힘을 모아 거인과 같은 보호장치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책 표지의 삽화에 표현된 왕관을 쓴 거인의 몸이 수백 명의 작은 사람으로 채워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만들어 낸 ‘리바이어던’은 때로 공포스럽게 작동한다. 수십억 명이 쌓아 올린 데이터로 굴러가는 플랫폼과 알고리즘, 그리고 인공지능(AI)이 그렇다. 우리에게 편리를 주는 동시에 우리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거인이 돼가고 있다. 거인은 우리가 힘을 모아 의지하는 방패가 될 수도 있고, 우리를 해치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거인의 뼈는 3000년 동안 한 번도 발굴되지 않았지만, 거인의 이야기는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지금 오랜 신화를 다시 꺼내 보는 이유는 거인을 만드는 것도, 다시 거두는 것도 결국 인간의 손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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