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의 시호와 생전 업적 등을 새긴 시책. 인종의 어머니는 이자겸의 둘째 딸, 인종의 두 왕후는 이자겸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이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문영 역사작가 고려 때 이자겸의 가문은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가문의 성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조상이 황실에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이들은 대대로 지금의 인천 지방에서 세족으로 지냈다. 조정에 진출한 이후에는 왕실과 혼맥으로 얽혀 권력을 넓혀 나갔다.
왕건은 수많은 호족과 혼인동맹을 맺어 자신의 정치력을 공고히 했는데, 이후 왕실은 족내혼을 거듭하면서 권력을 외부와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근친혼의 결과로 자손이 귀해지면서 결국 외부에서 혼인 대상을 찾아야 했다. 이때 이자겸의 가문이 그 기회를 잡았다. 문종, 순종, 예종, 인종에 걸쳐 모두 이씨 가문이 왕비 자리에 올랐다. 특히 예종은 이자겸의 둘째 딸을, 인종은 이자겸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왕비로 맞았다. 말하자면 인종은 이모와 결혼한 셈이다.
한 집안에서 연달아 왕실과 혼인했으니 이자겸의 권세는 국왕에 버금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인종은 어려서 이자겸의 집에서 자라기까지 했다.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에게 대항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자겸은 위협이 될 만한 왕족은 귀양 보냈고, 자신을 비난하는 신하도 죽이거나 유배 보내 권력을 독점했다. 제안후 왕서는 벼슬을 마다하고 술독에 빠져 주정뱅이 흉내를 내며 화를 피했다. 이자겸은 여진 정벌의 영웅인 척준경과 사돈지간이 되어 위세를 더했다.
이러다 보니 항간에는 이자겸이 왕이 될 것이라는 풍문도 돌았다. 인종도 이자겸을 불편해했다. 국왕이 이자겸을 제거할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챈 측근들이 궐기해 이자겸 일당을 공격했다.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제거되는 등 인종의 이자겸 제거 작전은 성공하는 듯했다. 이자겸은 뜻밖의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척준경이 분연히 일어섰다. 척준경은 궁궐 담을 넘어 들어가 인종을 사로잡았다. 싸우는 동안 날이 저물어 적들이 궐내로 숨어들자 척준경은 궁궐을 불태워 버렸다. 공포에 질린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고려에 의인이 없지는 않았다. 내친김에 왕위를 넘보던 이자겸의 뜻을 꺾은 문신도 있었고, 이자겸의 편으로 궁궐에 투입됐으나 국왕 편에 선 장군도 있었다. 하지만 척준경의 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수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었다.
이제 완전히 이자겸의 세상이 된 듯싶었다. 이자겸은 감히 자신에게 도전한 인종을 제거할 생각을 하고 독살을 기도했는데, 이를 이자겸의 넷째 딸이 사전에 감지하고 두 번의 독살 시도를 모두 막아냈다. 아버지와는 뜻이 달랐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 사이에 내분까지 발생했다. 척준경이 궁궐을 침입하고 화재까지 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이자겸 쪽에서 흘러나왔고, 척준경은 심사가 뒤틀렸다.
인종은 척준경에게 밀지를 내려 회유에 나섰고, 척준경 역시 즉각 인종 쪽으로 돌아섰다. 척준경은 20여 명만 거느린 채 이자겸 일당에 맞서기 위해 나섰고, 곧 군사를 규합해 이자겸을 사로잡았다. 1126년 2월 말에 벌어진 인종과 이자겸의 대결은 5월 말에 와서야 척준경이 인종 편에 서면서 끝났다. 이자겸은 체포된 다음 날인 5월 21일(음력)에 유배됐고, 그해 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분수를 지켰다면 명예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 이자겸의 비참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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