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눌지왕 때 왜에 볼모로 잡힌 태자를 구한 뒤 순국한 충신 박제상의 초상화. 영해박씨대종회 제공
이문영 역사작가 신라 내물왕 37년 1월에 내물왕은 동서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이는 삼국 관계를 뒤흔들 심각한 사건이었다. 인질 외교는 오늘날의 시각에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 동아시아 질서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내물왕과 실성은 모두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의 사위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미추왕 이후 세 명의 석씨 왕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미추왕의 직접적인 사위라기보다는, 미추왕 가문의 후손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실성은 몰락하던 석씨를 외가로 뒀고, 석씨는 김씨인 내물에 비해 왕위 계승에서 불리한 위치였다. 왕위를 차지한 내물은 잠재적 왕위 계승자인 실성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위험도 제거하고 강대국과 화친도 한다는 일석이조의 포석으로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제공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볼모를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고, 급속히 세력을 키우던 고구려와의 화친이 절실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
당시 고구려의 왕이 그 유명한 광개토왕이었다. 그는 392년부터 백제를 본격적으로 압박해 수많은 성을 빼앗았고,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까지 받아냈다. 위기에 몰린 백제는 왜에 태자를 볼모로 보낼 정도였다. 399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했다. 서라벌이 함락될 위기에 빠졌으나 광개토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 신라를 구했다. 내물왕의 인질 외교가 빛을 발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신라의 위기를 불러왔다.
고구려는 국내 지지 기반이 부족한 실성을 차기 신라 왕으로 낙점했다.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실성은 내물왕을 제거하고 쿠데타로 왕위를 차지했다. 그 후 실성왕은 즉각 내물왕의 막내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버렸다. 왜는 고구려의 적대 세력이었음에도 신라가 왜와 통호(通好)하고자 한 것은 고구려 입장에선 심기가 불편한 일이었다. 실성왕은 고구려를 달래기 위해 내물왕의 둘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실성은 고구려의 힘을 빌려 내물왕의 장남 눌지까지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실성의 행보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고구려는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눌지가 실성을 제거하고 왕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눌지왕도 고구려의 바람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눌지는 볼모로 간 동생들을 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고구려, 왜와 험악한 관계가 됐다. 하지만 눌지왕은 새로운 탈출구를 만들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백제는 크게 위협을 느끼게 되어 신라에 화친을 요청했는데, 눌지왕이 과감하게 받아들여 나제동맹이 이뤄진 것이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왜라는 네 방향의 위협에 둘러싸인 약소국이었다. 처음에는 가장 강한 고구려에 기댔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 백제와 동맹을 맺으며 외교의 균형을 맞췄고, 그새 내부를 다질 시간을 벌었다. 강대국 사이에서 줄을 잘 서고, 필요할 때는 줄을 바꾸는 것. 신라는 그렇게 살아남았고, 마침내 한반도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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