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단체 연설서 ‘성장’만 29차례 언급
‘말의 성찬’ 공허한 건 비용개념 결여 때문
싹 안 튼 AI산업 과실부터 나누자는 비약
親기업 행보 기대한 중도층은 실망할 것
박중현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그제 연설만큼 국회 교섭단체 연설이 주목받는 경우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지자가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로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우(右)클릭’ 급변침을 추진한 영향이 크다. ‘성장’이란 말이 29번 등장한 이번 연설은 우파 성장담론의 비중을 늘리려고 애쓴 기색이 역력했다. 기존 ‘먹사니즘’ 비전을 ‘잘사니즘’으로 업데이트한 것도 ‘먹고산다’는 말이 풍기는 생계형 이미지에 경제 성장의 색채를 입히기 위해서일 거다. 하지만 좌우를 넘나드는 42분간 말의 성찬에도 그의 메시지가 공허하게 느껴졌다는 평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연설의 내용이 ‘자원은 유한하다’는 경제의 기본 전제에서 이탈해 있기 때문이다. 이번을 계기로 이재명표 ‘기본 시리즈’를 공식 철회할지 많은 이들은 주목했지만 “보편적 기본사회에 대비해야 한다”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발언을 통해 결코 포기할 뜻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알려진 대로 지난 대선 때 공약처럼 전 국민에게 연 100만 원씩 나눠주는 기본소득에는 매년 50조 원 이상의 돈이 든다.
돈 푸는 정책은 거둬들이지 않으면서 A(AI·인공지능), B(바이오), C(콘텐츠와 문화), D(방위산업), E(에너지), F(제조업)은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나하나가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국들이 수조∼수백조 원을 투입해 키우는 산업이다. 미중의 AI 패권 독점을 좌시할 수 없다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AI에 투자한다고 밝힌 액수가 163조 원이다. 자유무역 질서가 해체되고, 자국우선주의가 확산함에 따라 산업 육성은 돈이 많이 드는 대단히 비싼 정책이 됐다.
과거 기본소득 재원조달 방법을 확실하게 내놓지 못했던 이 대표는 ‘ABCDEF 산업’ 육성의 비용도 어디서 조달할지 제시하지 않았다.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선진국 정부들은 세금에서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주거나, 세금을 깎아준다. 하지만 이 대표와 민주당은 법인세율 인하, 대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초부자 감세’라며 반대해왔다. 그렇다면 과도한 복지공약을 축소하려는 의지라도 보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기본소득은 복지정책이면서 성장정책”이라며 국민에게 돈만 나눠주면 경제가 알아서 성장한다는 ‘오리너구리론(論)’의 확장판일 뿐이다.
최근 이 대표의 친기업 행보에 기대를 걸었던 기업인들은 이번 연설을 보고 기겁했을 공산이 크다. “첨단기술 분야에서 장시간 노동과 노동착취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란 표현은 반도체특별법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에 그가 내비쳤던 전향적 태도의 진의를 의심케 한다. 그는 한국의 근로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5위라는 통계를 인용해 “AI와 첨단기술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주 4일제’ 도입도 주장했다. 이제 막 AI에 투자하자면서 나중에 맺힐 과실을 분배할 궁리부터 하는 셈이다. 그가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을 때 “비행기가 수직 이착륙하는 시대가 열린다”면서 김포공항 이전을 공약했던 것만큼 중간 과정을 한참 건너뛴 비약이다.
게다가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OECD 38개 회원국 중 33위로 바닥권이란 통계는 무시됐다. AI를 도입해 높아질 생산성만큼 근무시간을 줄이자는 건 ‘임금 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을 의미한다. 높은 최저임금을 피해 ‘신기술’인 키오스크를 도입하면서 직원 수를 줄인 자영업자에게 남은 직원에겐 5일 치 임금을 주면서 4일만 근무시켜야 한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원전보다 훨씬 생산비용이 비싼 재생에너지 비중을 빠르게 늘리자는 에너지 정책은 연설문 안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급등한 산업용 전기요금의 직격탄을 맞은 게 이 대표가 ‘산업위기대응 특별지역’까지 선포해 지원하자는 철강, 석유화학 산업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제조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화석연료까지 마구 퍼내 전기요금을 낮춰주겠다고 한다. 게다가 연설 전문을 뒤져봐도 비용 안 들이고 기업을 뛰게 만들 ‘규제 완화’ ‘규제 개혁’ 같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에선 경제성장을 자본, 노동, 생산성의 함수로 본다. “진보 정책이든 보수 정책이든 유용한 처방이라면 총동원하자”고 주장하려면 이 정도 기본 전제에는 동의해야 한다. 연설에 나타난 이 대표의 성장, 기업에 대한 인식은 일반 상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번 연설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조기대선을 기대하면서 이 대표가 중도 확장을 노리고 내놓은 ‘대선 출사표’라는 해석이 많다. 그렇다면 최소한 중도 성향 유권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상적 논리로 가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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