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웃음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가짜”… 니체가 일깨운 웃음의 힘[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3일 23시 09분


플라톤이 창조한 철학자 전통… “이성적 사고 방해” 웃음 제거해
웃음으로 권위 깨려고 한 니체… “진리 주장 앞에선 화보다 웃음”
‘복 오면 웃는다’면 며칠 못 웃어… 웃을 일 없어도 웃으면 복 온다

‘세계 영화사의 손꼽히는 광대’ 찰리 채플린. 그는 우스꽝스러운 행색과 도시 곳곳에서 벌이는 왁자지껄 소동으로 웃음을 유발하며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선사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세계 영화사의 손꼽히는 광대’ 찰리 채플린. 그는 우스꽝스러운 행색과 도시 곳곳에서 벌이는 왁자지껄 소동으로 웃음을 유발하며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선사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웃음 잃은 사회, 웃음의 철학

예전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다. 배삼룡, 구봉서 등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이 출연해서 힘든 시기에 큰 웃음을 주었던 것으로유명하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마흔은 넘지 않았나 싶다. 요즘 우리는 웃음이 금지된, 웃음이 추방된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기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가장 웃지 않는 직업군을 꼽으라면 철학자가 있다. 철학자는 근엄하다. 철학자는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늘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 진리를 말하면서 웃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플라톤은 웃음을 철학의 영역에서 쫓아낸 철학자로 유명하다. 플라톤이 세운 학원은 웃음을 참아야 하는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웃다 보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제력을 잃게 된다는 이유였다. 웃음은 전염성도 있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웃음은 가장 낮은 단계의 감정이고, 이성적 사고의 능력을 방해하는 유해한 감정이었다. 이에 플라톤은 희극을 경멸했고 모든 웃음을 주는 문학작품을 쓰는 시인, 익살꾼, 재담꾼도 허용하지 않았다.

철학자가 추구하는 진리는 세상의 즐거움과는 무관하다. 철학자는 너무 슬퍼해도 안 되고 너무 웃어도 안 된다. 이성적 인간의 판단은 감정의 흐름에 휘말려선 안 된다. 따라서 진지한 철학적 논쟁이 이뤄질 때 웃음을 자극하는 일이 금지됐다. 철학자가 웃음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웃음이 갖는 해로움 때문이다. 웃다 보면 감정에 동요가 와서 자칫 생각의 흐름이 끊길 수 있다. 이처럼 웃음은 감정에 큰 변화와 움직임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철학자 자신도 웃을 수 없지만, 아테네 시민도 자신의 영혼을 배려하라고 강조했던 철학자를 비웃을 수 없었다. 플라톤처럼 지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깊이 사유하는 자는 낄낄대거나 시시덕거리지 않는다.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는 철학자에 의해 웃음을 잃은 사회가 됐다.

‘철학자는 웃지 않는다’는 전통을 만든 플라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철학자는 웃지 않는다’는 전통을 만든 플라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철학자는 웃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전통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이러한 웃음에 대한 억압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편을 희극으로 가정하고 기독교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웃음을 어떻게 억압했는지 보여준다. 수도원의 성직자가 ‘희극’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한다는 내용의 소설인데, 종교에서 인간이 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불경한 행위가 된다. 따라서 성당이나 교회에서 웃는 일은 거의 없다.

웃음의 중요성을 일깨운 니체.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웃음의 중요성을 일깨운 니체.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니체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제거된 웃음의 중요성을 되찾는다. “오늘 가장 잘 웃는 사람이 마지막에도 웃을 것이다.” 진지함, 엄숙함, 견고함으로 감춰진 철학자의 권위를 웃음으로 깨고자 한 것이다. 모든 엄숙함과 무거움을 없애는 방법은 ‘화’가 아니라 ‘웃음’을 통해서다. 따라서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것에 화를 내지 말고 웃으면서 대응하라고 말한다.

니체의 예시를 보면, 누군가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론을 내세우는 것보다 오히려 그냥 웃어넘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면 신에 대한 공포도 저절로 없어진다. 신에 대해 비웃는 자는 신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신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진지함이 없다. 따라서 종교의 권위 자체도 사라지게 된다.

진리는 엄숙함이 아니라 웃음에서 생겨난다. 니체에겐 웃음 자체가 진리가 된다. “한 번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 춤과 웃음은 한 몸이다. 매일 춤을 추면서 크게 한 번 웃는 것 자체가 진리를 경험하는 일이다. 진리는 머리의 생각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직접 살아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니체에게 웃음은 이 세상에서 경박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다. 플라톤처럼 웃음을 함부로 경멸하거나 추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 웃게 되는가?

웃음의 진짜 이유는 사랑이다. 충분히 사랑하는 사이라면 웃음은 저절로 생겨난다. 미워하는 마음이나 복수심에서는 웃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일상 세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긴장시키는 모든 상황에서 잠시 자유로울 때 웃게 된다. 따라서 웃음에는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다. 우리가 의미를 두지 않는, 예측할 수 없는 엉뚱한 상황에서 웃음이 생겨난다. 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을 니체는 ‘무의미에 대한 기쁨’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웃을 이유가 없을 때에도 당당하게 웃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웃음은 모든 목적과 규범을 넘어서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우리가 웃어넘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모든 ‘중력의 악령’(무거운 정신)이다.

만약 ‘웃으면 복이 와요’를 뒤집어 ‘복이 오면 웃는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일생에 웃을 날이 얼마나 될까? 어려운 시험에 붙고, 직장에서 승진하며, 사업으로 대박을 터뜨리는 짧은 시간에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합산하면 며칠 되지 않을 것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니체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하루에 한 번 크게 웃어야 된다. 비록 기쁜 일이 없더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크게 웃고 나면 큰 복이 따라올지 모른다. 요즘 유행하는 ‘럭키비키’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마음, 명랑함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다.

#웃음#철학#플라톤#니체#진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