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칼럼]이재명의 ‘주판알 정치’에 휘둘리는 47석 비례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4일 23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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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역별 병립형 속내는 ‘직할당’ 키우겠다는 것
떴다방 준연동형보단 권역별 병립형이 낫지만
私的 이익에 公的 제도 좌우되는 황당한 현실
비례제 결정 과정, 유권자들 똑똑히 기억할 것

정용관 논설실장
정용관 논설실장
우리나라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창안자는 사실상 박정희였다. 5·16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앞으로의 선거 제도엔 비례대표제의 장점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1963년 6대 총선 때 정당정치 강화를 명분으로 무소속 출마는 아예 봉쇄되고 비례제가 처음 도입되는 계기였다. 비례 의석은 44석이었는데, 지역구 1당에 ‘2분의 1’ 이상을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한국적 비례제’는 태어날 때부터 기형적이었다. 다만 5·16 세력은 제1야당도 ‘3분의 1’은 챙길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윤보선의 민정당은 지역구 26석에 그쳤는데도 비례 14석을 챙겼다. 그러자 7대 총선에선 ‘2분의 1’ ‘3분의 1’ 특례가 다 폐지됐다.

이후 1970년대 유정회 암흑기를 거쳤고, 전두환 시절 비례제가 부활했지만 지역구 1당에 통 크게 비례 ‘3분의 2’를 몰아줬다. 그러다 1985년 신민당 돌풍을 계기로 여당이 무조건 지역구 1당이 될 것이란 확신이 없어지자 ‘3분의 2’는 ‘2분의 1’로 바뀌었고, 민주화를 거치며 1당 특례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훨씬 더 복잡하고 숨은 스토리가 많지만 권위주의 정권 시절 우리 비례대표 역사는 한마디로 집권 여당에 대한 ‘보너스 의석’을 어느 규모로 할 것이냐의 게임이었다.

87년 체제 이후 비례제 배분 방식은 ‘지역구 의석수’ ‘지역구 득표율’ ‘정당 득표율’ 등 한발 한발 진화(進化)의 길을 걸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을 제외한 채 ‘준연동형 비례제’로 게임의 룰을 일방적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준연동형은 지역구 의석이 많으면 비례 의석은 손해 보는 구조다. 그런 혁명적 방안을 제1야당과의 합의도 없이 강행했으니 선거법 협상에서 물먹은 현재의 국민의힘 측이 위성정당을 만든 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문제는 민주당까지 위성정당을 따라 만드는 후안무치한 행태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 문턱을 낮춰 다당제를 구현한다는 ‘아름다운 이상’은 온데간데없고 전대미문의 위성정당, 떴다방 정치 같은 ‘추악한 퇴행’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올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준연동형을 폐기하고 지역구 의석에 연동되지 않는 ‘권역별 병립형’을 도입하는 방안을 만지작거리며 몇 달째 여론 눈치를 살피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다당제를 위한 선거 개혁, 비례제 강화는 평생의 꿈” 등의 말을 쏟아내며 위성정당을 금지하는 준연동형을 공약해 놓고 이를 뒤집으려니 논리가 군색한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이 대표의 병립형 회귀를 위한 전 당원 투표 움직임에 대해 준연동형을 지지하는 측은 무신불립(無信不立) 소탐대실(小貪大失)을 지적한다. 맞는 말이나 이 대표 머릿속에선 전혀 다른 차원의 셈법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범야권 내 주도권 다툼이다. ‘준연동형파’는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승부를 펼치고, 비례는 위성정당이 됐든 자매정당이 됐든 이른바 범진보비례연합 플랫폼으로 치르자는 거다. 조국과 유시민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 대표는 왜 병립형 쪽으로 기우는 걸까. 사법 리스크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 밖의, 통제 밖의 범진보 연합 세력은 언제든 우군이 아니라 적군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 아닐까. 어차피 욕먹을 거 대놓고 위성정당을 만드는 방안도 있지만 누구를 대리인으로 내세울지, 2020년 총선 때 당시 야당에서 있었던 ‘한선교의 반란’ 같은 사태는 없을지도 고민일 것 같다.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이 직접 공천까지 통제할 수 있는 ‘직할당’으로 가려는 의도로 보인다. 물론 제3지대 신당 견제라는 목적은 국민의힘과 이심전심일 것이란 생각도 하고 있을 듯하다.

현재로선 이 대표가 소수 정당 배려 조항 가미 등의 명분을 붙이는 방식으로 권역별 병립형을 택할 공산이 크다. 개인적으론 위성정당, 떴다방 정당 난립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권역별 병립형만 제대로 운용해도 지역 구도 해소 등 정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고 한국적 비례제는 또 한발 진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분명한 건 47석 비례 의원 선출 방식이란 공적(公的) 제도가 이 대표의 사적(私的) 이익에 좌우되는 상황 자체가 비정상이란 점이다. 바로 그때문에 이 대표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실기했다고 본다. 멋지게 지는 길도, 추하게 이기는 길도…. 비례제의 방식이나 복잡한 계산 방식까진 몰라도 이 대표의 주판알 정치에 장기간 휘둘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국민도 똑똑히 보고 있을 테니.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이재명#주판알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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