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美하버드대 손보기 나선 애크먼… 사무실로 몰려간 시위대[글로벌 현장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0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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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현지 시간) 미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투자자 빌 애크먼의 사무실 건물 앞에서 한 여성이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이 여성을 포함한 시위대는 애크먼이 이틀 전 사퇴한 하버드대 최초의 흑인 여성 총장 클로딘 
게이 전 총장의 사임을 압박했으며 비(非)백인을 위한 ‘DEI’ 정책에 전쟁을 선포했다고 비난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4일(현지 시간) 미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투자자 빌 애크먼의 사무실 건물 앞에서 한 여성이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이 여성을 포함한 시위대는 애크먼이 이틀 전 사퇴한 하버드대 최초의 흑인 여성 총장 클로딘 게이 전 총장의 사임을 압박했으며 비(非)백인을 위한 ‘DEI’ 정책에 전쟁을 선포했다고 비난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김현수 뉴욕 특파원
김현수 뉴욕 특파원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가 공격받을 때 우리는 뭘 하지?”

“맞서 싸운다!”

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11번 애비뉴. 헤지펀드업계의 거물이자 ‘리틀 (워런) 버핏’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유명 투자자 빌 애크먼(58)이 이끄는 퍼싱스퀘어캐피털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약 30명의 시위대는 2일 반(反)유대주의 및 표절 논란으로 전격 사임한 클로딘 게이 전 하버드대 총장이 애크먼을 비롯한 보수 진영이 제기한 ‘DEI 공격’의 희생양이 됐다며 피켓을 들었다.》



하버드대 동문으로 모교에 약 5000만 달러(약 660억 원)를 기부한 애크먼은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중동 전쟁이 발발하자 게이 전 총장을 비롯한 명문대 총장들이 학내의 반(反)유대주의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는다고 비판해 왔다. 이에 다른 월가 보수 성향 기부자들과 함께 게이 전 총장 사임을 주장했고 끝내 관철시켰다.

이날 시위는 유명 흑인 인권운동가 앨 샤프턴 목사가 이끄는 시민단체 ‘MAN’이 주최했다. 게이 전 총장의 사퇴가 단순히 친(親)이스라엘, 반이스라엘의 문제를 넘어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 내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문화 전쟁’ 양상을 띠고 있다는 의미다.

“DEI 전쟁의 희생양”
DEI는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의 영어 앞글자다. 인종, 성별, 성적 취향, 장애 등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미 대학 입학, 기업의 고용 기준 등으로 쓰인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비(非)백인의 계층 이동을 도와주는 사다리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미국의 전통 가치인 ‘능력주의’를 훼손시키고 특히 백인 남성을 차별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미 엘리트주의의 상징 하버드대는 이 DEI를 둘러싼 논란의 한복판에 있다. 지난해 6월 연방대법원이 소수인종 우대 정책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위헌이라고 판결하자 진보 진영에서는 흑인, 히스패닉계의 명문대 입학이 어려워졌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 와중에 게이 전 총장 사임 후폭풍까지 겹쳐 그야말로 DEI 전쟁터가 됐다.

이날 시위는 소규모였지만 사안의 중요성과 상징성 때문에 ABC뉴스, 폭스뉴스, 블룸버그TV 등 주요 언론사의 취재 경쟁이 뜨거웠다. 평소 조용한 맨해튼 미드타운 서쪽 지역에 시위대가 등장하니 주변 직장인들이 관심을 갖고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벌이는 모습도 보였다. 다만 애크먼은 이날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자신이 해외로 나와 사무실에 없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 사브리나 씨는 “다른 대학도 아니고 ‘하버드’에서 처음으로 흑인 여성 총장이 등장하지 않았나. 그런데 곧바로 사퇴해 안타까웠다. 그래서 시위에 나왔다”고 말했다.

아이티계인 게이 전 총장은 지난해 7월 1636년 개교한 하버드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총장에 올라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게이 전 총장 또한 자신의 사임은 보수 진영의 인종 및 DEI 공격의 일환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사임 직후 뉴욕타임스(NYT)에 쓴 기고문에서 “(표절과 관련해) 내가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나에 대한 공격은) 한 대학과 지도자를 넘어선 공격이었다”며 인종차별적 공격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밝혔다.

샤프턴 목사 또한 취재진에게 “애크먼은 DEI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게이 전 총장은 그 희생양”이라고 외쳤다. 이어 “DEI가 등장한 것은 (비백인에 대한) ‘거부’가 만연했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명인도 갑론을박
게이 전 총장은 지난해 12월 5일 엘리자베스 매길 전 펜실베이니아대(유펜) 총장, 샐리 콘블루스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과 하원 교육노동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당시 세 사람은 “중동 전쟁 발발 후 ‘유대인을 죽이자’고 공공연히 외치는 일부 학생이 대학의 윤리 규범을 위반했느냐”는 엘리스 스터파닉 공화당 의원 등의 질문에 “맥락에 따라 다르다”는 모호한 답변을 해 유대계와 보수층의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11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대 캠퍼스 게시판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에 관한 
게시물이 붙어 있다.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 하버드대는 반(反)유대주의 논란에 따른 내부 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다.보스턴=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지난해 11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대 캠퍼스 게시판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에 관한 게시물이 붙어 있다.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 하버드대는 반(反)유대주의 논란에 따른 내부 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다.보스턴=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당시 하버드대는 팔레스타인 지지 학생들의 본관 점거, 보수 성향 동문들의 기부 취소 등으로 이미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수습해야 할 총장이 지도력을 보여주기는커녕 공개 청문회에 나가 부적절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이 높아졌다. 공화당의 주요 대선 주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도 가까운 보수 운동가 크리스토퍼 루포는 게이 전 총장을 강하게 비판하며 그의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게이 전 총장과 비슷한 처지였던 매길 전 총장은 청문회 나흘 만에 사임했다. 하지만 당시 하버드대 이사회가 게이 전 총장을 지지하고 표절 논란 또한 감싸자 이사회의 DEI 정책에 대한 보수 진영의 불만은 더 커졌다. 애크먼은 수시로 X에 글을 쓰며 하버드대 DEI 관련 조직을 없애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인 브렛 스티븐스 NYT 칼럼니스트 또한 “게이 전 총장은 학자로서 26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고, 학술지 게재 논문도 11편밖에 없다. 학문적 업적이 빈약한 인물이 어떻게 미 학계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대학들이 과도하게 DEI를 중시하는 사이 본연의 임무인 지식, 발견, 아이디어의 자유롭고 활발한 경쟁의 중요성이 감소했다고 우려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까지 가세했다. 머스크는 “인종을 기반으로 사람을 뽑는 DEI가 인종차별적”이라며 애크먼을 두둔했다. 미 경제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가 애크먼의 아내인 네리 옥스먼 전 MIT 교수에 대해 표절 의혹을 제기하자 이 매체를 고소하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억만장자 기업인이자 최근까지 미 프로농구(NBA) 댈러스 매버릭스의 구단주였던 마크 큐번은 DEI가 기업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고 ‘애크먼 연합’을 비판했다. 머스크는 이런 큐번에게 “언제쯤 매버릭스 농구팀에 키 작은 백인이나 아시아계 여성을 볼 수 있느냐”고 비꼬았다. 큐번은 “DEI도 당연히 능력을 기반으로 사람을 뽑는다. 다만 최대한 다양한 인재풀 속에서 ‘최고의 인재’를 찾자는 취지”라고 반박했다.

“진영 논리 위험” 자성도
일각에서는 모든 사안을 진영 논리나 정치적 편향성에 따라 판단하는 문화가 미 명문대 전반에 퍼져 있으며, 이것이 해당 대학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DEI 정책의 본질까지 훼손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선제 공격을 단행한 하마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진영 논리에 의거해 ‘우리 쪽 표절은 덜 나쁜 표절’ 같은 태도를 보이면 DEI에 대한 사회 전반의 지지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는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게이 전 총장을 감싸기 위해) 갑자기 표절의 정의를 고민하고 있다. 표절 대신 ‘인용 오류’ 같은 단어를 쓴다”며 일부 진보 성향 언론인의 태도를 비판했다. 보수 운동가 루포가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고 게이 전 총장의 표절을 덮을 수는 없다는 취지다. 존 맥워터 컬럼비아대 언어학 교수 또한 NYT에 “현재의 DEI 정책이 사람들을 대립 관계로 만드는 측면이 있다”며 나만 정의롭고 상대방은 아니라는 태도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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