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처벌 강화, ‘포퓰리즘’ 아닌 법의 공백 없애는 수단 돼야 [수요논점]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16일 00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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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벌주의’ 논란
최근 강력사건, ‘묻지마’ 범죄 늘자 국민 대다수 높은 형량 원해
사회적 공분 산 사건 터지면 서둘러 법 제정 및 양형 반영
범죄 예방 효과는 입증 안 돼… 피해자 고통 치유에는 효과

《최근 범죄가 흉포화하고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사례가 많아지면서 형벌의 강도도 함께 높이는 ‘엄벌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촉법소년 연령 하향, 살인 예고 온라인 글 등을 처벌하는 ‘공중 위협죄’ 신설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음주운전, 보복범죄 등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나 첨단기술 유출, 주가 조작 등 국가와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범죄에 대해서도 형량을 높여 가는 추세다. 여기에 최고 형량이 징역 10년이었던 영아살해죄처럼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법 규정들 역시 바꿀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최근 신림동, 서현역의 ‘묻지 마 칼부림’의 영향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 추진이 탄력을 받고 있다. 흉악범을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자는 발상이다. 현행 우리 형법에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형벌은 사형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다. 사형 선고는 2016년 GOP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이 마지막이었다.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위헌법률 심사는 1996년, 2010년 합헌으로 나왔다. 2019년 또다시 위헌심판이 제기됐지만 지난해 7월 공개 변론을 연 뒤 여전히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사형 다음으로 중한 형벌인 무기징역의 경우에도 수감 20년이 지나면 가석방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 매년 10명 이상, 많게는 40명까지 무기수가 가석방된다. 최고 50년까지 늘어난 유기징역형보다 더 가벼운 형량이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사형과 무기징역 모두 영원한 사회와의 격리라는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셈이다.

이 때문에 유명무실한 사형과 무기징역 대신 미국 등 일부 국가가 운영 중인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도입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지난달 대법원은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에 대해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택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효과를 보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이 문제는 입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을 14일 입법 예고했고, 국회에서도 조정훈 의원 등이 관련 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다. 국민 여론도 찬성이 많다. 한국갤럽이 8∼10일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1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87%가 도입에 찬성했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제외한 모든 주가 이 제도를 두고 있고, 2021년 기준 5만5900여 명이 수감 중이다. 미국의 한 주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대상을 늘린 뒤 폭력 범죄가 30%까지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많은 세금이 든다는 것이 단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감자 1인에게 드는 평균 비용은 연 2500만 원 정도. 가석방 없이 50년간 수형 생활을 한다고 하면 12억 원이 넘는 돈이 든다. 고령이 될수록 치매 관절염 같은 의료비가 추가된다. 또 사형과 마찬가지로 범죄 예방 효과는 실증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 인권 침해의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종신형은 응보적 관점에서 사회 복귀를 절대 못 하게 하는 것인데 교화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비록 범죄자라도 인간성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촉법소년 연령의 하향

지난해 강원 원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한 중학생이 술을 팔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주를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리면서 ‘나는 촉법소년이야’라고 큰소리쳤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임을 방패 삼아 무법자 행세를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촉법소년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됐다. 법무부는 지난해 연령을 현행 14세 미만에서 13세 미만으로 낮추는 법안을 발의했다. 최근 살인 예고 글을 온라인에 올렸다가 검거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이고 그중에 촉법소년도 끼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연령 하향 논의가 다시 불붙는 양상이다.

흔히 촉법소년으로 불리는 10∼13세는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대신 소년법에 따른 보호처분을 받는다. 살인 같은 강력 범죄를 저질러도 보호처분에서 가장 강력한 처벌은 소년원에서 2년을 지내는 것이다.

촉법소년의 범죄 현황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강력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이 3만5000여 명에 달한다. 재범률도 성인 보호관찰자의 3배가 된다. 어리다고 봐주기에는 성인 뺨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촉법소년들은 형법이 제정된 1950년대 초와 비교할 때 신체나 정신적 발달 면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현재 13세 남자아이의 평균 키는 165cm로 1960년대 성인과 비슷하다. 여기에 13세와 14세의 범죄 발생 건수에 차이가 없고 특징도 다르지 않다. 2019년 여론조사에서도 촉법소년에 대해 ‘현재보다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와 ‘성인과 같이 처벌해야 한다’는 응답을 합치면 83.6%나 됐다.

외국의 경우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플로리다주의 경우 7세부터 형사처벌한다. 영국은 10세, 독일 일본 오스트리아 등은 14세다.

하지만 연령을 한 살 낮춘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들거나 현재 추세가 꺾인다는 보장이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청소년 범죄는 가정환경 등에 많이 좌우되고 반성할 여지도 큰데 너무 이른 나이에 범죄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대법원도 올 4월 법무부 법안에 대해 “사회적 지원 없이 연령 하향으론 근본적 해결이 이뤄질 수 없다”며 반대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연령 하향은 현실을 감안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심각한 수준의 강력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에 대해선 형사처벌의 길을 열어둘 필요가 있지만 그 숫자는 얼마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엄벌주의 효과 논란

형량 강화는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미국 유럽에서도 엄벌 경향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미국의 주들에서 도입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특히 9·11테러 같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를 겪고 난 뒤 범죄자 인권보다 다중의 안전과 범죄 억제가 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엄벌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미국의 경우 전 세계 인구의 4%를 차지하는데 전 세계 수감자의 24%를 보유하고 있다. 사형제가 있는 주의 평균 살인율은 사형제가 없는 주보다 높다. 엄벌만으로는 강력범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교화나 개선 등의 가능성을 없앤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셈이다. 특히 예상을 뛰어넘는 범죄가 대중적 공분을 일으킬 때마다 신속하게 법률이 제정되거나 양형기준이 상향된다. 정치인에게도 손쉽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어서 ‘형벌 포퓰리즘’이 발생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근대 사법의 역사는 국가의 자의적 형벌권 남용을 막기 위해 피의자의 권리 보호와 부당한 대우 방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 같은 사법제도가 틀이 잡힌 상황에선 잔혹한 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과 처지를 이해하는 관점 역시 중요해지고 있다. 범죄로 인해 소중한 존재를 잃거나 일상생활이 파괴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겐 그들의 고통보다 지나치게 낮은 형량은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영국에선 2019년 17세 소녀 엘리가 동급생에게 13차례나 칼로 찔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소년법에 따라 가해자는 1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는 데 그쳤다. 이에 분노한 부모는 미성년자 살인범의 형량을 높이자는 캠페인에 나섰다. 2년 후 희생자의 이름을 딴 ‘엘리의 법’이 제정돼 17∼18세의 살인범에게 최고 27년형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민식이법’ ‘윤창호법’ 등 피해자 이름을 딴 법이 늘어나는 것은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이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수단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량을 높이면 범죄가 줄어든다’는 단순한 엄벌 논리보단 복잡하고 예기치 못한 현대사회의 범죄에 대한 법의 공백이 없도록 막는 것이 중요하다. 피의자의 권리를 예전처럼 보장하면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적극 대변하는 양형기준과 형사·사법 정책의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엄벌주의 논란#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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