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으로 여기고 맡겼다”… 메이도프 사기 닮은 SG사태[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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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조작 사태로 번진 SG증권발 폭락
인맥 바탕 거물들 자금 유치… 메이도프, 650억 달러 ‘폰지’
라덕연도 연예인-재계 친분 과시, 골프연습장 등 중심 은밀히 영업
조금씩 서서히 주가 띄워 수익률 높아지면 정산 뒤 재투자
감독 시스템 허점 여실히 드러나… 시장 감시와 처벌 강화 필요

《“우리는 (버나드) 메이도프를 신으로 여겼고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다.”(엘리 위젤 노벨평화상 수상 작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내가 번 모든 돈은 쟤(라덕연 대표)한테 다 준다. 종교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가수 임창정 씨)

2009년 미국 역사상 최악의 금융사범으로 알려진 버나드 메이도프가 저지른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사기)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22세에 본인의 이름을 딴 투자회사를 차리고 1970년대 초부터 2008년까지 136개국의 약 3만7000명을 상대로 650억 달러(약 82조 원) 규모의 사기극을 벌였다.

지난달 24일 한국 주식시장에서도 SG증권에서 매도 물량이 쏟아지며 8개 종목 주가가 무더기로 폭락하면서 초대형 주가조작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 있다. 작전 세력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라덕연 H투자컨설팅 업체 대표에게 돈을 댄 투자자만 1000여 명, 투자 금액은 8000억∼1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메이도프와 라 대표의 투자자들은 한때 이들을 ‘신’처럼 떠받들며 거액의 돈을 맡겼다. 이들은 어떻게 오랜 기간 금융 당국의 감시를 피해 세력을 키울 수 있었을까.


● 화려한 인맥 앞세워 ‘장기 작전’

미국의 메이도프 금융사기와 최근의 SG증권발 사태, 두 사건은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화려한 인맥을 토대로 한 맹목적 믿음, 유명인과 고액자산가들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장기간 비상식적 수익률을 보장했다는 점 등이다.

1938년 미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메이도프는 1990년부터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세 차례 지낸 ‘월가의 거물’이었다. 최고급 골프클럽에서 자산가들과 골프를 즐기며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각종 자선 활동을 통해 본인의 평판을 관리했다. 인도주의재단을 운영하던 노벨상 수상자 위젤을 비롯해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감독, 애니메이션 제작사 드림웍스의 제프리 캐천버그 대표,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 등의 거물이 그의 먹잇감이 됐다.

이번 SG증권발(發) 주가 폭락 사태에서도 라 대표는 연예인, 재계 회장 등과의 친분을 내세워 투자자를 유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가수 임 씨와 박혜경 씨, 이중명 전 아난티그룹 회장 등이 주요 투자자였던 것으로 알려지며 구설수에 올랐다.

연예인이 소유한 빌딩에서 골프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라 대표의 측근 프로골퍼 출신 안모 씨를 통해 연예인들에게 은밀한 ‘투자 영업’을 했고, 피부관리숍, 고급 주점 등을 차려 다단계 점조직 형태로 인맥을 넓혀 갔다. 투자자들은 라 대표에게 개인정보와 휴대전화를 모두 일임할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다.

두 사건 모두 장기간에 걸쳐 ‘밑그림’을 그리고 판을 키워 나갔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메이도프는 투자자들에게 시장 변동성과 상관없이 연 10∼20%의 수익률을 보장했는데, 실제 그가 주식이나 금융상품에 투자한 금액은 ‘0원’이었다. 메이도프는 투자자들의 돈은 자금세탁을 거쳐 자신의 계좌에 넣어둔 채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지급하는 ‘돌려막기’ 방식으로 투자 규모를 키웠다. 장기간 더 많은 투자자를 모을수록 수익금으로 나눠줄 여윳돈과 본인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이번 SG 사태에서도 주가조작 세력은 약 3년간 거래량이 적은 종목들의 주가를 하루에 약 1%씩 상승하도록 시세를 조종했다. 더 오래 더 조금씩 주가를 올릴수록 주가조작이 드러날 가능성은 낮아지고 수익률은 높아졌다. 주가 폭락 직전인 지난달 21일 기준 대성홀딩스 주가는 3년 전보다 약 1223%, 선광은 1106%, 삼천리는 606% 올랐다. 이들은 투자 수익률이 30%가 넘으면 정산해 주고 다시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수익의 50%를 수수료로 챙기고 원금에 수익금을 더해 재투자를 권유했다. 단기간 치고 빠지는 과거 주가조작 수법과는 달랐다. 게다가 차액결제거래(CFD) 계좌를 통한 ‘빚투’(빚내서 투자)로 수익률을 극대화해 투자자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 금융당국의 감독 능력 도마 위에…CFD 관리 소홀로 사태 자초 지적도
두 사건 모두 금융당국의 감시망을 완전히 피해 가며, 감독당국의 ‘무능’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월가를 뒤집은 메이도프 사기의 경우에도 발각되기 전부터 수익률을 두고 꾸준히 의문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수차례 메이도프에 대한 조사에 나섰음에도 문제점을 잡아내지 못했다.

수년간 주가조작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 금융당국도 전혀 해당 종목들의 이상 거래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초 “작전 세력이 몇 개 종목의 주가를 비정상적으로 띄우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뒤에야 뒤늦게 서울남부지검, 금융감독원 등과 공조하며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 등의 뒤늦은 대처로 이번 사태의 피해가 커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폭락이 시작된 지난달 24일은 이미 금융위가 관련 제보를 받고 열흘 남짓 흐른 뒤였다. 주가조작 세력 중 일부가 당국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보유 주식을 대거 처분하면서 유례없는 주가 폭락이 시작됐다는 분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라 대표에게 돈을 댄 투자자 중 정·재계 인사들이 상당수인 만큼 주가조작 세력이 당국의 조사를 감지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상거래 징후를 포착해야 하는 한국거래소도 감시 소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주가가 특별한 이유 없이 급변할 때 거래소는 해당 회사에 시장에 공개되지 않은 변동 요인이 있는지 묻고 공시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거래소는 지난 3년간 주가조작 종목들에 시황 변동 관련 조회 공시를 요구하지 않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세력이 3년여에 걸쳐 매일 주가의 1% 정도만 치밀하게 움직여서 잡아내기 쉽지 않았다”고 토로하지만 당국을 향한 책임론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당국은 주가조작 세력이 투자자 신원을 숨기면서 레버리지를 일으키는 데 이용한 CFD 위험 관리에 소홀해 불씨를 키웠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개인 전문투자자 진입 문턱을 낮춰 CFD 시장을 성장시켜 놓고 그에 상응하는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융위는 2019년 전문투자자 자격을 금융투자상품 잔액 기준 5억 원 이상에서 5000만 원 이상으로 완화했다. 그 결과 2021년 말 기준 개인 전문투자자는 2만4365명으로 전년(1만1626명) 대비 약 2.1배로 증가해 전체 거래의 97.8%를 개인 전문투자자가 차지했다.

● “시장 감시 시스템 개편, 투자자 보호 강화 필요”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CFD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한편 주식 내부자 거래에 대한 사전 공시 제도 등 각종 예방책을 도입하고 나섰다. 전문가들은 더 교묘해진 제2의 SG 사태 등 신종 금융사기가 또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의 대응보다 근본적인 감시 및 처벌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작전 세력이 장기간 서서히 주가를 조작하는 것은 기존 시장 감시 시스템의 사각지대였을 것”이라며 “시장 감시 시스템이 너무 자주 작동되는 것도 문제지만, 새로운 유형의 주가조작에 대해서도 사전 경고음이 울리도록 감시 체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주가조작범은 날아다니는데 금융당국은 뛰어다니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금융 범죄는 고도화되는데 금융위 내 디지털 포렌식 전문 인력이 한 명도 없는 만큼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관련 인력을 더 투입하고 첨단 감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주가조작 등 증권 범죄에 가담한 경우 최대 10년간 계좌 개설, 주식 거래를 제한하고 금융·상장회사 임원에 취직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차액결제거래(CFD·Contract For Difference)
투자자가 증권사에서 산정한 증거금을 낸 뒤, 주가 변동에 따른 차액만 결제하는 장외 파생상품 거래.

1억원의 증거금으로 2억5000만 원의 주식을 매매하는 식으로, 증거금의 2.5배를 투자할 수 있음.

레버리지 투자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용융자와 유사.


신아형 기자 abro@donga.com
강우석 기자 wskang@donga.com
#주가조작#금융당국의 감독 능력#시장 감시 시스템#투자자 보호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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