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의 對話]“젊음 바쳐 나라 지켰다는 걸 내 나라에서 인정받고 싶을 뿐”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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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레지옹 도뇌르 훈장 받은 박동하 옹

박동하 옹은 “전쟁이 그렇게 치열했는데 유엔 참전국에서 훈장을 받은 한국군이 어떻게 저뿐이겠느냐”며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라도 꼭
 실상을 파악해 걸맞은 예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동하 옹은 “전쟁이 그렇게 치열했는데 유엔 참전국에서 훈장을 받은 한국군이 어떻게 저뿐이겠느냐”며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라도 꼭 실상을 파악해 걸맞은 예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진구 기자
이진구 기자
《최근 6·25전쟁 때 세운 무공으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까지 받은 노병들의 국립현충원 안장이 거부됐다. 현행 국립묘지법이 국내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만 대상으로 하기 때문.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자 국가보훈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언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6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박동하 옹(94·예비역 하사)은 “60여 년 동안 국방부, 육군본부 등에 전쟁 때 세운 무공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민원 접수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까.

“우리 육군에 기록이 없다는 거지요. 제가 1951년 경기 양평 ‘지평리 전투’, 강원 양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잘 싸웠다고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동성십자훈장 두 개를 받았어요. 그걸 인정받고 싶어서 전역하고 1960년대부터 국방부, 육군본부 등에 민원을 넣었지요. 그런데, 대부분 접수도 제대로 안 해줬어요. 어쩌다 받아줘도 우리 측 기록이 없어 인정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당연하지요. 전 프랑스 대대에 배속돼서 싸웠으니까 전투 기록은 프랑스에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프랑스 기록을 제출하면 될 텐데요.

“왜 안 했겠어요. 그런데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사실증명까지 보냈는데도 인정해주지 않더라고요. 제가 프랑스군에 배속돼 싸웠을 뿐이지, 프랑스를 위해 싸운 게 아니잖아요. 외국군에 소속돼 치른 전투는 조국을 위해 싸운 게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프랑스가 대신 기록하고 훈장을 준 것뿐인데…. 프랑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주는데 정작 내 나라는 60년 동안이나 모른 척했으니….”

※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1∼5등급까지 있고, 슈발리에는 5등급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조앤 롤링, 삼총사의 알렉상드르 뒤마, 드레퓌스 사건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지휘자 정명훈 등이 슈발리에를 받았다.

―지평리 전투가 6·25전쟁 10대 전투 중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더군요.

“당시 중공군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잃었어요. 중공군은 5만 명 정도였는데 우리는 국군, 미군, 프랑스군 다 합쳐 5000여 명에 불과했지요. 사흘간 밤이 되면 중공군이 꽹과리와 나팔을 불며 쳐들어오는데, 마치 시커멓고 커다란 파도가 끝없이 몰아닥치는 것 같았어요.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죠. 그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더라고요. 정신없이 총을 쏘고 백병전을 벌였는데… 지평리 전투는 패전을 거듭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물리친 최초의 전투였어요. 이 승리로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고요.”

―프랑스 부대에는 어떻게 배속된 겁니까.

“제 고향이 평안남도 순천인데 전쟁 터지고 공산당을 피해 서울로 내려왔어요. 집안이 소지주 정도 됐는데, 계속 남아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1950년 12월 국군에 입대했고, 두 달 정도 지난 후 미 2사단 23연대 프랑스 대대에 배속됐지요. 프랑스군으로만 대대 병력을 모두 채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한국군을 차출했다고 해요. 한국군은 14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영어 소통이 가능해서 뽑혔다고 하던데요.) “그 정도는 아니고, 중졸 이상 중에 ‘예스’ ‘노’ 정도만 할 줄 알면 뽑았어요. 부대 안에서는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어요. 프랑스군이 대단했던 게 미군 연대장이나 사단장도 프랑스 대대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맥아더 장군과도 맞짱을 뜨시던 분이니까요.”

6.25 당시 프랑스 대대 소속으로 무공을 세워 레종도뇌르 훈장 받은 박동하 옹. 외국인이지만 프랑스 부대에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프랑스 군인과 똑같이 대해줬다고 회고한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인데 대대장이 어떻게….

“우리 대대장이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자진 강등한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었거든요.” (자진 강등요?) “우리 국민 중에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가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유엔군 파병이 결정됐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잖아요. 프랑스도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대요. 그래서 프랑스 정부가 시찰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몽’ 장군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고, 몸소 전국을 돌며 모병해 참전했어요.”

―프랑스군은 전부 자원병이었습니까.

“네, 모두 자원 입대자들이었어요. 그런데 편제상 대대는 중령이 지휘하기 때문에 중장이 맡는 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자, ‘몽’ 장군이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며 중령으로 자진 강등해 한국에 왔지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자유와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며…. 그때 그분이 58세였어요. 아내는 만삭이었고요. 1, 2차 세계대전을 다 겪은 분이에요.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했겠지요. 더군다나 어린 아들과 만삭의 아내를 두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는 그런 분들의 희생으로 지켜졌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랄프 몽클라르(1892∼1964). 본명은 라울 샤를 마그랭베르느레. 몽클라르는 2차대전 때 나치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다.

―종전 후에도 프랑스와 계속 교류를 가졌더군요.

“그 사람들이 참 대단한 게, 외국인이지만 프랑스 부대에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저희들을 프랑스 군인과 똑같이 대해줬어요. 1960년대 중반쯤인 것 같은데… 주한 프랑스대사관 무관이 저를 수소문해서 연락을 해 오더라고요.” (대사관 무관이 왜….) “보니까 전쟁 때 함께 싸운 소대장이었어요. 참전했던 장교들이 종종 무관으로 오더라고요. 올 때마다 연락을 하고,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6·25전쟁 참전 관련 행사를 하면 늘 불러줬지요. 프랑스에서 높은 분들이 올 때도 꼭 초청해주고요. 전쟁에서 보여준 제 무공 때문에 프랑스군 위상이 높아져 감사하다면서요.” (실례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2018년 프랑스 외교부 장관이 왔을 때 판문점에 동행한 것도 그런 차원입니까.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부 장관이었는데, 이번에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박문준 씨와 함께 갔지요. 2019년 방데…뭐라는 전함(프랑스 태평양함대 소속 방데미에르 전함)이 인천항에 왔을 때도 초청받아 갔고요. 한국과 프랑스 간에 군사적인 행사가 있으면 꼭 부르더라고요. 전에는 제가 버스 타고 갔는데,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차를 보내줘요.”

―작년 5월 프랑스 국방부가 파리에서 6·25전쟁 참전 대대 전사자 명비 제막식을 가졌는데 한국군 24명도 포함됐더군요.

“전쟁 때도 느꼈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가 한국군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똑같은 전우로 대해줬어요. 그리고 정말 대단한 게,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기록을 보존하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잖아요. 자기 나라 군인도 아니고, 차출된 남의 나라 졸병 명단까지 70년을 보존한다는 게 어떤 국가의 철학,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육해군 3421명을 파견한 프랑스는 전사자 262명, 부상자 1008명, 실종자 7명이 희생됐다.

―선생님처럼 유엔 참전국에 배속된 한국군이 2만 명이라는데, 우리는 정확한 명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박동하 옹이 받은 레지옹 도뇌르(왼쪽) 훈장과 군사훈장.
박동하 옹이 받은 레지옹 도뇌르(왼쪽) 훈장과 군사훈장.
“제가 작년에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군사훈장’, 올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는데, 없던 무공을 갑자기 세워서 받은 게 아니잖아요. 전쟁 때 프랑스 대대에서 무공훈장 받은 기록이 남아 있어서 세월이 지나 받게 된 거죠. 이번에 제 문제로 논란이 되니까 국가보훈처가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유엔 참전국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겠다고 했는데, 다행이기는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거죠.” (혹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 부상도 좀 있습니까? 최고 훈장인데.) “하하하, 별거 없더라고요. 우리 돈으로 월 6000∼7000원 정도 나오는데,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게 관행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돈이 아니라 명예지요.”

―실례지만, 왜 그토록 무공훈장을 인정받고 싶었던 겁니까.

“제 나이 아흔넷인데 뭘 더 바라겠어요. 단지 목숨을 걸고, 젊음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는 걸 내 나라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것뿐이죠. 현충원 안장 요청도 그런 차원이고요. 훈장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프랑스 대대에서 함께 싸웠던 140여 명의 한국군 전우들은 이제 거의 다 죽었어요. 훈장을 받은 저도 인정을 못 받는데, 그들은 누가 기억을 해주나요.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기억을 해주는데, 정작 조국에서는 아무도 모른다면…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운 건가요.”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박동하 옹#프랑스 최고 훈장#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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