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언어[삶의 재발견/김범석]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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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외국인 스님을 진료했던 적이 있다. 파란 눈의 외국인 스님은 한국어를 못했고 통역이 없어서 진료는 영어로 이뤄졌다. 보통 진료가 끝나면 간호사가 환자에게 안내를 해준다. 수납은 어디서 해야 하는지, 항암주사를 맞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검사실은 어디인지, 다음 진료는 언제인지 등. 진료 후에 간호사가 진료실 밖에서 안내를 해야 하는데 내심 걱정되었다. 우리 외래 간호사가 영어를 못했기 때문이다.

걱정도 잠깐. 빠끔히 열린 진료실 문 밖으로 외국인 스님과 간호사의 모습이 보였는데, 놀랍게도 이 둘이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다. 그것도 중간중간 웃고 맞장구를 치면서 다정하게…. 그 모습이 의아해서 나중에 물어보니, 손짓발짓으로 눈치껏 다 설명이 되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파란 눈의 스님과 영어를 전혀 못하는 한국인 간호사가 서로 원활히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소통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나 역시 영어 울렁증이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나보고 영어를 잘한다고 했다. 겸연쩍어서 농담하지 말라고 했더니, 정말 내 영어가 괜찮다고 했다. 내가 영어를 잘했던가 되짚어봐도 내 영어 실력이 별로임은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영어를 잘한다고? 아 유 키딩?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결은 이것이었다. 영어가 잘 안 들리니, 외국인을 만나면 정자세를 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을 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물어보며 확인을 하였고, 내가 이해한 것이 맞으면 밝게 웃으며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하니, 나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었다. 7만큼 듣고 3만큼 말했다. 대화를 끝내면서는 전체 내용을 요약하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분명히 하고 끝맺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인들은 나와 소통이 잘된다고 느꼈고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반면 한국인들과의 대화가 문제였다. 한국말에 능통하니 대충 흘려듣는 경우가 많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내가 상대방 말을 잘 안 들었고, 상대방 역시 내 말을 잘 안 들었다. 서로 경청하거나 존중하는 자세가 안 나오는데 소통이 될 리 없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느꼈고 상대방도 나를 보며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상대방의 언어를 몰라도 소통이 되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한국어를 잘하고 영어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어를 못하고 영어를 잘하는 것일까. 과연 무엇이 우리를 소통시키는 것일까.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소통#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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