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비대면 진료 스타트업 ‘닥터나우’의 사무실에는 자리마다 팻말이 있다. 직원의 영어 이름과 성격유형지표(MBTI), 자신을 규정한 단어들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이 회사 장지호 대표(25)의 MBTI는 외향적 리더 유형인 ‘ENTJ’이고, 자기소개는 ‘#디테일 집착 #사용성 #워커러버(worker lover)’다.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MBTI를 MZ세대는 혈액형 검사만큼이나 친숙하게 여긴다. 결과를 맹신해서는 안 되지만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이 회사는 왜 MBTI를 써 붙였을까. “경력 입사자가 많아 서로에게 말을 걸고 상대를 존중하는 계기가 필요했어요.”(장 대표)
‘추앙’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TV드라마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성적인 사람은 그냥 내성적일 수 있게 편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나?” 직원들의 MBTI를 써 붙인 회사라면 내성적인 직원을 억지로 직장 동호회에 가입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국내 기업계의 화두는 단연 인재 확보다. 턱없이 부족한 정보기술(IT) 개발자를 ‘모시는’ 일이 기업 생존의 기본 조건이 됐다. 코로나19는 인재 전쟁에 불을 붙였다. 재택근무 덕택에 회사 눈치 보지 않고 이직(移職) 면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연한 근무형태를 찾아 대기업을 떠나 스타트업으로 옮기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기업들은 조직문화 정비에 바쁘다. 고된 출근길을 뚫고 회사에 온 직원들을 환대해야 한다.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밥을 주는 스타트업 문화의 영향을 받아 대기업들도 ‘식(食) 복지’를 늘리고 있다. 한 대기업은 간식을 워낙 후하게 제공해 직원들이 집에 싸 갈 정도다. “물가가 무섭게 오르니 회사에서 준 구운 계란으로 장조림 만들어 먹어요.”
일부 개발자들이 회사를 옮길 때마다 몸값이 ‘억’ 소리 나게 치솟으면서 ‘돈을 좇는 메뚜기’라고 비난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가려진 ‘달의 뒷면’이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지난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가 집값을 다락같이 올려놓아 MZ세대를 서울 바깥으로 밀려나게 했다”고 말한다. ‘밝을 때 퇴근했는데 집에 도착하면 밤이 되는’ 고단한 청춘들에게는 미래의 꿈보다 지금의 돈이 시급하다. 대출이자는 오르고 월세 내기도 힘겨운데 당장 연봉을 올려준다면 이직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들 눈에는 한 직장을 충성스럽게 다닌 선배보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몸값을 불린 선배가 능력자로 비친다.
많이 배우고 많이 일하지만 적게 버는 미국 밀레니얼세대를 다룬 ‘요즘 애들’이란 책은 번아웃(burnout·소진)이 우리 시대의 상태라고 한다. ‘노오력’해도 벽을 넘을 수 없어 ‘공정’에 매달렸던 한국의 MZ세대는 그나마 자신이 협상할 수 있는 몸값으로 스스로를 ‘추앙’하며 버텨내는 중이다. 그러니 회사가 원격근무 한다며 감시의 눈을 들이대면 그냥 싫다. “지쳤어요. 나갈래요.” 서울 강남에 집 가진 기성세대가 “요즘 애들은 돈을 밝히느라 엉덩이가 가볍다”고 탄식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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