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에서 떠난 유람[공간의 재발견/정성갑]

정성갑 한 점 갤러리 클립 대표 입력 2021-10-08 03:00수정 2021-10-0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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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갑 한 점 갤러리 클립 대표
어떤 공간이 좋은 공간일까 종종 생각한다. 담양 소쇄원처럼 마음을 쉬게 하는 곳도, 이태원 구찌 매장처럼 눈과 감각이 즐거운 곳도 좋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멀리 데려가 주는 곳도 빼놓을 수 없다. 신자가 아님에도 성당이나 사찰에 가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잠시나마 영성에까지 가닿는 신비와 아득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최근 찻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차와 담소가 있는 이 공간이 참 다층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가 묘약이 돼 두세 시간 즐거운 여행을 하는 기분이랄까. 우선 찻자리에서는 사람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차를 만든 사람과 다기를 만든 사람. 어떤 마음가짐과 인생사, 집념과 기술로 차를 재배하고 다기를 만드는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입으로 들어간 찻물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고 손에 쥔 찻잔이 더 특별하게 보인다. 차를 재배하는 산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36개의 봉우리, 72개의 동굴, 99개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중국 우이산이나 차나무의 키가 15∼20m에 달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찻잎을 딴다는 중국과 대만의 고산 야생 차 산지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풍경이 아스라이 그려지며 그곳을 이미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최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 신관 꼭대기층에 몽재(夢齋)라는 다실이 오픈했다.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가 카인드건축 김우상 소장과 함께 ‘블랙박스’를 콘셉트로 구현한 곳. 벽면은 물론 가리개부터 방석까지 모든 인테리어 요소를 블랙으로 마감했고 마루는 일부러 삐거덕 소리가 나게 짜 맞췄다. 가로로 길쭉한 테이블은 목공예가 키미누가 나무의 표면을 검게 태우는 낙동 기법을 이용해 제작했고, 바느질 작가인 최희주는 티 매트를 만들며 먹염색한 모시에 가늘게 꼰 실크실로 한 줄 능선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북악산과 한옥의 기와들. 사위가 어두워질수록 블랙박스는 그림자가 너울대는 밤의 마당처럼 깊은 정취를 만들어냈고 차와 국화를 좋아한 정약용으로까지 흘러간 찻자리는 그 자체로 못 갈 곳이 없는 한 편의 여행이었다.

가을을 느끼며 국화주도 한잔 곁들였는데 술 향이 남아있는 찻잔에 차를 따라 마시니 몸 곳곳에 기분 좋은 향취가 퍼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신을 놓지 않으니 찻자리는 마음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바로 세우는 시간이 아닐지. 이 시대 우리의 가장 큰 욕망은 여행. 비록 발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가볍고 멀리 가는 유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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