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하지 않는 영혼[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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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거지를 그리다

김홍도가 그린 습득도(왼쪽 사진)와 명나라 중기 주신(周臣)이 그린 유민도 일부. 김홍도의 그림은 일견 거지를 그린 것 같지만 ‘습득’이라는 유명한 중국의 행각승을 그렸다.
김홍도가 그린 습득도(왼쪽 사진)와 명나라 중기 주신(周臣)이 그린 유민도 일부. 김홍도의 그림은 일견 거지를 그린 것 같지만 ‘습득’이라는 유명한 중국의 행각승을 그렸다.
번영하는 도시와 그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묘사한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태평성시도는 현실을 핍진하게 그린다기보다는 존재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상적인 도시 상태를 그린다. 반면 한국 회화사에서 현실의 도시 속 거지 그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얼핏 거지를 그렸다고 보이는 그림은 대개 속세로부터 초탈한 신선이나 도인을 그린 그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로 발달한 신선, 도인, 거지, 좀비, 자유인 등은 외견상 잘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김홍도의 습득도(拾得圖)는 마치 거지를 그린 것 같지만 거지를 그린 것이 아니라 습득이라는 유명한 중국의 행각승(行脚僧)을 그린 것이다. 행각승은 구걸을 하기는 하지만 본령이 거지는 아니다. 습득도는 거지 그림 장르인 유민도(流民圖)가 아닌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라는 다른 장르에 속한다.

거지를 지칭하곤 하는 유민(流民)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유(流)’라는 글자는 어딘가에 구속돼 있지 않고 움직이는 유동성을 나타낸다. 어딘가에 정주할 곳을 찾아 삶을 영위해야 할 사람이 그러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는 뜻이다.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할 위정자의 관점에서 보면 거지는 문젯거리이자 불안 요소였다.

한국 회화사에선 유민도를 찾기 어려운 반면에 중국 회화사에서는 그 나름의 유민도 전통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유민도가 명나라 때 주신(周臣·1472∼1535)이 그린 것이다. 주신의 유민도가 명나라 중기에 그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명나라 창건자 주원장(朱元璋)은 사람들의 장거리 이동성이 최소화된 나라를 꿈꾸었다. 주원장의 이상향은,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평생 정박하여 살아갈 고장과 직업이 정해지고, 그 정해진 곳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며 살다 죽는 세계였다. 그러나 사회는 끊임없이 바뀌기 마련이다. 주원장은 그러한 불가피한 사회 변화의 역동성을 건국의 청사진 안에 충분히 담지 않았다. 사회 변화를 최소화하고자 한 주원장의 의지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공무원 시험 과목을 표준화했고, 이민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자 했고, 대외 무역을 금지하거나 최소화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명나라 중기 이래, 사회 변화를 추동한 것은 상업이자 돈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골치 아픈 직역(職役)을 때우고자, 돈 주고 사람을 사서 대신 일을 시켰다. 장거리 교역이 큰 이윤을 가져온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자, 사람들은 점점 더 멀리 떠나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런 상업 종사자들을 위한 여행안내서와 지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이 외지로 떠돌자, 홀로 남겨진 부인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 와중에 다른 곳에서 그 고장으로 흘러들어온 남자가 그녀를 유혹한다. 그로 인해 불륜이 생겨나고, 그 불륜을 다룬 소설이 창작된다. 그 소설은 흥미진진했기에 상업적 교역망을 타고 널리 팔렸다. 하필 그 무렵 해외로부터 은(銀)이 대량 유입돼 경제를 자극했다. 활성화된 경제는 사회를 가일층 유동적으로 만들었다. 상업의 발달로 인해 빈부 격차가 생겨나고, 그로 인해 부자도 늘어나지만 빈자도 늘어났다. 한 재산 모은 사람들은 그 재산을 사회적, 정치적 신분으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상류층의 문화를 모방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빈자는 점점 더 거리로 떠돌게 되었다.

주신의 유민도는 바로 이러한 유동적인 시기가 시작되던 때에 그려졌다. 태평성시도에 묘사된 모습들은 사람들이 투영한 이상적 모습이기에 당시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고 추정하기 조심스럽다. 유민도 역시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그렸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주신의 유민도에 묘사된 거지들의 면면을 보면 당시 거리를 떠돌던 거지들의 외양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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