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가 필요한 사람들[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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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쓰리 빌보드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미국 미주리주의 변두리, 세 개의 거대한 광고판(빌보드)에 커다랗게 글자만 박힌 광고가 붙는다. ‘죽어가면서 강간당했는데’ ‘아직도 못 잡았어?’ ‘뭐야, 윌러비 경찰서장?’ 7개월 전 17세 딸을 잃은 이혼녀 밀드레드가 경찰에게 망신을 줘 수사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였지만 평판 좋은 서장이기에 주변 반응은 싸늘하다. 서장은 췌장암 말기임을 고백하며 광고를 내려주길 청하지만 그녀는 그러니 죽기 전에 범인을 잡아야 한다며 몰아붙인다.

윌러비 서장의 충복인 딕슨은 경찰이라는 완장을 차고 폭력을 휘두르는 시한폭탄이다. 모두가 싫어하는 그를 유일하게 감싸주는 이가 서장인데 그 서장이 갑자기 자살을 한다. 악화되는 병세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딕슨은 그놈의 광고판 때문이라며 광고업자를 죽도록 팬다. 그날 밤 광고판도 불에 탄다. 밀드레드는 딕슨의 소행이라 여겨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딕슨은 중화상을 입는다. 하지만 광고판 방화는 그녀의 전남편 소행이었다.

스무 살짜리 여자한테 빠져 가정을 버린 남편 때문에 밀드레드의 마음은 항상 부글거리는 용광로였다. 딸과의 사소한 말다툼 중에 남편 얘기로 폭발한 그녀는 딸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내쫓았고, 그날 밤 딸은 저주받은 듯이 살해당했다.

밀드레드는 자신을 탓하는 대신 경찰을 비난했고, 전남편을 원망했고, 자기편을 들지 않는 마을 전체를 적으로 여겼다. 딕슨은 공격적 성향의 엄마와 단둘이 살아오며 마음속에 분노를 가득 키웠고, 그 분노를 엄마가 아닌 주변 약자들을 괴롭히는 데 쏟았다. 밀드레드와 딕슨의 공통점은 복수를 엉뚱한 곳에 한다는 거다. 영화는 내면의 분노를 분출할 상대를 찾아다니는 두 인물이 서로를 괴롭히며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죄책감을 외면하고자 잘못을 덮어씌울 먹잇감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 행세를 하며 남 탓을 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버팀목이기에. 그런데 이럴수록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결국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고 여전히 개선되는 것은 없고 또 남 탓을 하고 또 되풀이될 뿐이다.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위험하다. 그런데도 책임 전가에 목청을 높이느라 본질을 놓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첫 확진자가 나온 후 한 달 가까이 보건소는 한 다리 건너 감염되었을 이들의 검사를 거부했고, 정부는 지역사회 감염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열등감이 심할수록 잘못을 남한테서 찾는다. 남 탓이 생활화된 사람들, 항상 핑계가 필요한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세상이 자신을 덮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사죄의 머리를 숙여봐라. 세상은 당신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이정향 영화감독
#쓰리 빌보드#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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