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은 더럽지 않다” [횡설수설/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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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은 더러운 말이 아니다. 절대주의자들은 다른 합리적인 견해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정치의 가치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 어제 영국 보수당 신임 대표로 선출된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에게 총리직을 물려줄 테리사 메이 총리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존슨 차기 총리는 10월 31일 유럽연합(EU) 탈퇴를 공언하고 있어 EU와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물러나는 메이 총리는 이를 예상한 듯 17일 마지막 연설에서 존슨 등 보수당 내 강경파를 겨냥했다.

▷메이 총리는 2016년 7월 브렉시트발(發) 혼란을 헤쳐 나갈 구원투수로 취임하면서 “모두를 위한 영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재임한 3년 동안 영국은 EU에 남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격랑 속에서 표류했다. 매년 부담금을 내고 EU 단일시장에 남는 ‘소프트 브렉시트’ 방안은 의회에서 세 차례나 부결됐다. 결국 스스로 물러나면서 메이 총리가 타협의 미덕을 강조한 건 브렉시트 강경파와 세계적 포퓰리즘 흐름에 맞서 브렉시트 연착륙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3년의 경험이 응축된 말일 터다.

▷메이 총리가 ‘유리절벽’에서 떨어진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유리절벽’은 조직에 막다른 위기가 닥쳐야 여성에게 고위직이 돌아가고, 그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현상을 빗댄 말이다. ‘유리천장’을 돌파해 보니 절벽인 셈이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 혼란을 만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당시 EU 탈퇴에 앞장서던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이 당 대표 경선에서 돌연 사퇴해 버리면서 얼떨결에 당선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 “남성들이 만든 쓰레기를 치우게 됐다”는 소리를 들으며 취임했는데 이제 임기 내내 메이 총리를 흔들던 존슨이 차기 총리로 등극했고 캐머런 전 총리도 정계복귀설이 솔솔 흘러나온다.

▷“정치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 않는다”는 메이 총리의 말도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곱씹어 보게 된다. 국민에게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정치가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민주당 초선 의원 4인방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 발언을 퍼부은 다음 “이 정치적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고 되레 큰소리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브렉시트 협상에서 백기만 나부낀다”며 대안 없는 강경론을 밀어붙이는 존슨 차기 총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메이 총리#브렉시트#타협#승자#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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