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젊었을 때 고생”의 가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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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 2017년 1월 유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했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조선대 강연에서 이런 속담을 언급했다가 청년층 일각의 빈축을 샀다. 좋은 뜻으로 했던 발언이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발언” “아직도 노력이 부족해서 죄송하다” 같은 비판과 비아냥을 부른 것이다. 초년고생은 훗날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지당한 말씀’ 속에 요즘 젊은이들의 정서와는 많이 동떨어진 부분이 있었나 보다.

▷중국에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6일 근무를 ‘996’으로 표현한다. 초과근무 관행대로 일하다가 병원의 중환자실(ICU)에 간다는 의미로 ‘996.ICU’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얼마 전 전자상거래 업계의 거물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 사내 행사에서 “만일 당신이 젊었을 때 996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불법 관행을 ‘커다란 복’으로 옹호하는 바람에 역풍을 만났다. 마 회장은 996을 마다하지 않고 불철주야 일한 사람들 덕에 “우리나라가 짧은 40년의 세월 동안 세계가 괄목할 성공을 이뤄낸 것”이라고 단언했으나 젊은 세대의 생각은 달랐다.

▷당장 인터넷이 시끌벅적해졌다. ‘자본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는 비난과 함께 청년 세대의 분노가 들끓었다. 결국 마 회장은 14일 자신의 웨이보 계정을 통해 일에 관한 열정을 강조하기 위한 취지였다면서 입장을 바꿔 구구절절이 해명했다. 국경을 초월해 청년들은 과거 세대와 다른 가치관, 다른 성공의 방정식을 추구하고 있다. 동아일보 100년맞이 기획으로 연재 중인 ‘부장님처럼 살기 싫어요’에 의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에 대한 청년 대상 설문조사에서 2명 중 1명이 기성세대 중 ‘롤모델이 없다’고 답했다. 경제력이나 지위 등으로 성공을 측량하는 부모 세대, 자신만의 취향이나 차별화된 삶 등을 중시하는 자식 세대, 두 세대의 의식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성세대는 젊은 시절 물불 안 가리고 했던 고생이 언젠가는 보람으로 돌아온다고 믿고 살았다. 동시에 세월이 흐를수록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오래된 유행가의 가사에도 십분 수긍하게 된다. 그러므로 젊은 세대에게는 스스로 선택한 고생인가 강요받은 고통인가, 혹은 정당한 보상이 부여되는지에 따라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사서 고생’ 혹은 ‘젊어서 노세’ 둘 중 어느 한쪽만 맹목적 신앙으로 여기는 것은 위험하다. 아마도 그 중간 어딘가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초과근무#마윈#알리바바#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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