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의 인생 영화]우리는 그들보다 뜨거운 적 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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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로크백 마운틴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2006년, 광화문의 영화관에서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던 조금 쌀쌀했던 봄날을 기억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느라 엔딩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집에 가기 아쉬워 지인들과 저녁을 먹으며 오랫동안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이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또 눈물이 났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와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애니 프루의 소설 ‘클로즈 레인지: 와이오밍 스토리(Close Range: Wyoming Stories)’ 속 30페이지의 짧은 이야기를 각색한 이 영화는 미국 와이오밍의 카우보이들이 주인공이다. 1960년대 동성애를 혐오한 서부 카우보이의 후예들이면서도 금기의 사랑에 빠진 잭(제이크 질런홀)과 에니스(히스 레저)의 20년에 걸친 러브 스토리다. 가난한 청년들은 밤낮으로 양떼를 지키다가, 아름다우면서도 황량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 사랑이 당시에는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고 자책한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타이어 레버로 성기가 뽑혀 죽은 사람을 아홉 살 때 목격한 에니스에게 동성애는 두려움이다. 잠깐의 사랑 뒤 어색한 이별을 했던 두 사람은 4년 뒤 다시 만나 20여 년간 감정을 이어간다. 둘의 사랑이 특히 비극적인 점은 감정을 이해받을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실존하지 않는 지명인 것처럼.

에니스는 잭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옷장에서 오래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피 묻은 셔츠가 그의 셔츠 속에 포개져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자기 집으로 돌아와 잭의 셔츠 위에 자신의 셔츠를 겹쳐 걸고, “잭, 나는 맹세해”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슬픈 러브 스토리보다 슬프다. 평생 사랑했으나 결국 지켜주지 못한 잭과 비극으로 끝난 사랑 앞에 에니스는 뭘 맹세했을까? 감독은 맹세의 의미를 관객에게 숙제로 남긴다.

리안은 시적인 무협영화 ‘와호장룡’, 19세기 영국 고전 로맨스 ‘센스 앤 센서빌리티’, 철학적인 판타지 ‘라이프 오브 파이’까지, 장르와 서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타인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서툴거나 너무 늦게 표현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먼저 손을 내민 잭에 비해 자주 뒷걸음치고 과묵한 에니스는 리안 영화의 인장 같은 존재다. 말수가 적지만 사려 깊게 찰나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그의 영화 정조는 그래서 고요하고 깊다. ‘내성적이지만 따뜻한 사람’을 만나 수줍은 악수를 나눈 느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는 ‘깊은 이해만이 사람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나직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 심재명 명필름 대표가 기억에 남는 영화를 소개하는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심 대표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 ‘건축학 개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공동경비구역 JSA’ 등을 제작했습니다.
#인생 영화#영화 소개#브로크백 마운틴#클로즈 레인지#와이오밍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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