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靑年 정현, 그대가 있어서 행복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5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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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했다. 지치지 않는 도전 의식과 패기는 싱그러웠다. 어제 세계 4대 테니스대회 호주오픈 남자단식에서 한국 테니스 역사상 첫 메이저 대회 4강 진출을 확정 지은 여드름투성이, 스물두 살 청년 정현은 시종 유쾌 상쾌 통쾌했다.

사흘 전 16강전에서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 8강전에서 미국의 ‘복병’ 테니스 샌드그런을 상대로 정현이 거둔 성적은 모두 3 대 0 완승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경기뿐만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메이저대회 4강 신화를 일궈낸 직후 코트 인터뷰에서 “마지막 경기 매치포인트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유창한 영어로 “세리머니 때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고 말해 관중들을 폭소케 했다. 인터뷰 말미 한국어로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준결승전이 열리는) 금요일에 뵙겠다”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큰 경기에서 승리하면 일단 울음을 터뜨리고 말을 잇지 못했던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느낀 국민이 많았을 것이다.

16강전 승리 후 중계 카메라 렌즈에 ‘캡틴 보고 있나’라고 단숨에 적어 옛 스승에게 감사 메시지를 보낸 정현이 4강행을 확정 지은 뒤 보여준 메시지는 ‘충 온 파이어’였다. 외국인들이 자신의 성을 ‘충’이라 부르는 것에 ‘완전히 불붙었다(on fire)’는 절정의 자신감을 곁들인 것이다. 20대다운 발랄함과 재치가 듬뿍 묻어난다. 메이저 대회 12차례 석권에 빛나는 가장 위대한 테니스 선수 중 한 명인 조코비치에게 완승을 거둔 뒤에는 패자에게 진심을 담아 존경과 존중을 보냈다. 자신감이 넘치되 우쭐대지 않는다.

서구인의 체격과 체력 조건에 최적화한 운동이라 불리는 테니스는 아시아인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인 듯했다. 더구나 정현은 어릴 때부터 고도 약시였다. 매해 몇 달씩 부상에 시달리며 랭킹이 떨어지기도 했고, 소속 팀이 해체되는 좌절도 맛봤다. 여러 핸디캡과 고난을 딛고 대한민국의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정현에게서 우리는 2002년 월드컵 때의 ‘꿈은 이루어진다’의 새로운 버전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정현은 도전 정신과 강인한 체력, 거침없는 영어 실력, 유머와 재치, 세련된 국제감각, 그 어떤 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과 여유 등 대한민국 청년의 모습을 전 세계에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들은 진지하되 심각하지 않다. 도전을 즐기며, 패자에 대한 예의도 잊지 않는다. 2000년 이후 최악이라는 실업률, 끊이지 않는 기회의 공정성 논란 등이 이들을 괴롭힐지언정 무릎 꿇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정현, 그대가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
#테니스#테니스대회 호주오픈#정현#노바크 조코비치#테니스 샌드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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