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문재인의 셀프디스는 자학 개그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6일 22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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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
광고인 출신이 만든 자기반성?
알고 보면 괜찮다는 자기자랑뿐

유머도 아닌 혁신캠페인이라니
국민에 대한 예의 아니다

야당의 정권교체 어렵게 만들어
‘여당의 세작’ 소리 들을 참인가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유머에도 등급이 있다. 듣는 이들이 유쾌하게 웃는 유머가 최상급이다. 분위기가 좋아진다면 말하는 사람은 좀 망가져도 괜찮다.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매력과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정치인 조크의 제1법칙이 스스로 망가지는 자학 개그다. 프롬프터만 보고 연설한다는 비판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백악관 출입기자 만찬에서 “청중이 웃는 동안 기다린다”고 짐짓 프롬프터의 괄호 속 지문을 읽어 청중을 뒤집어지게 만든 적도 있다.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셀프디스’를 보는 순간, 나는 자학 개그인줄 알았다. 셀프디스는 자신에게(self) 결례(disrespect)한다는 의미의 인터넷 신조어인데, 의원들의 자기반성 메시지를 담은 혁신 캠페인 1탄이라는 거다.

이걸 만든 새정연 홍보위원장이 ‘처음처럼’ ‘참이슬’의 상표명을 지은 유명 광고인 손혜원 씨다. 그는 “자기반성이 지나치게 무겁고 진지할 수 있다는 우려에 일부러 셀프디스라는 다소 유머스러운 용어를 썼다”고 했지만 암만 내용을 읽어봐도 반성이 없다. ‘인권변호사로 일하다 보니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 같은 문재인의 오글거리는 자기자랑 뿐이다.

화제를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면 이 캠페인은 성공했다. 하지만 듣는 이를 불쾌하게 만드는 유머는 최하등급밖에 못 준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가 유머로 성공한 이유는 ‘못생겼지만 괜찮다’는 이심전심이 있어서이지만 문재인의 카리스마 부재엔 그런 공감대도 없다. 자학 개그도 사회적 지위나 호감도가 낮은 사람이 하면 되레 역효과라는 진화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손 위원장은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셀프디스를 유머시리즈 아닌 반성 캠페인으로 내놓았다는 건 당의 의사결정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자청해서 벌을 서겠다는 정치인이 히죽거리며 자기자랑이나 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박주선의 ‘분당, 분당 해서 죄송합니다’, 김현의 ‘내가 누군지 알아? 외쳐서 죄송합니다’ 등등 조롱 섞인 패러디가 정말 재미있고 신선해서 쏟아지는 줄 아는가.

선거를 앞둔 이미지 쇄신용이라면 또 모른다. 2012년 광고인 조동원 씨가 “나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서도 일을 위해 당적을 갖고, 당명과 상징 색까지 바꿔 결국 선거 승리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그는 당이 달라질 것 같다는 ‘진정성의 사기’라도 쳐서 표를 얻어냈지, 알고 보면 괜찮다고 우겨대진 않았다.

정치마케팅이란 ‘정치와 마케팅의 결혼’이어서 유권자가 원하는 바에 맞춰 당의 정책을 만들어 파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1994년 영국 노동당 대표직을 맡은 뒤 ‘새 노동당, 새 영국’의 기치를 만들어내 1997년 18년 만에 정권을 찾아온 토니 블레어는 정치마케팅을 최대한 이용한 정치리더였다. 당의 이데올로기를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는 정치시장 변화와 소비자 요구를 적극 수용해 수구좌파 노선을 버리고 ‘제3의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번 새정연의 셀프디스엔 진정성은커녕 유권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정치마케팅 개념도 없다. 선거마다 깨져서 지지도가 20%대에 불과한 정당이면 뼈를 깎으려 해도 깎을 뼈가 남아있지 않아 절치부심(切齒腐心)을 해도 부족할 판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뢰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변해야할지 진지한 고민도 없이, 그냥 잘 봐달라고 유머 섞어 우기는 건 정치 희롱이자 국민 우롱이다. 새정연의 민주정책연구원이 최근 ‘영국 총선 분석’에서 “노동당은 꼴통 보수당 지지자를 설득할 필요도 없고, 기업친화적 정책을 쓸 필요도 없다는 ‘망상의 정치’에 빠져있다”고 한 지적이 새정연에 딱 들어맞을 정도다.

손 위원장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나라를 위해 새정연을 돕겠다”는 마음이라면 반성문부터 다시 만들기 바란다. 진짜 잘못을 빼놓는 셀프디스는 반성이랄 수 없다. 문재인에게 강한 카리스마가 있었다면 이데올로기도, 능력도 한물 간 친노의 ‘도구’로 간택되지도 않았다.

혁신위원회라는 대리기구를 통해 친노패권주의를 사수하는 문재인의 반성 없이는 새정연의 정권교체 가능성은 멀어질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셀프디스나 장난처럼 만든다면 강남좌파 또는 보수를 자처하는 손 위원장은 새누리당의 ‘세작’ 소리를 들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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