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밤 가족과 함께 서울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일주일 전 분향소에 가자고 할 때 숙제 때문에 안 된다던 중학교 1학년생 딸아이가 이날에는 “빨리 가자”며 더 성화였다. 오후 9시경 도착한 서울광장 분향소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곧장 줄을 서 있던 10여 명의 시민과 함께 조문했다.
조문을 마치고 광장을 둘러봤다. 시민들의 소리 없는 통곡이 담긴 노란 리본들이 주렁주렁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한쪽 탁자에 자리를 잡고 노란 리본에 조문의 글을 적었다. 딸은 아빠가 볼까봐 한 손으로 리본을 가리고 사인펜을 꾹꾹 눌러가며 한 글자씩 써내려갔다. “어른들 잘못 때문에, 언니 오빠들한테 미안해요.” 딸이 리본에 쓴 글을 보고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딸아이가 나를 꾸짖는 것 같았다. “아빠 잘못이에요.”
지난달 16일 꽃다운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허망하게 가라앉았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화물 운송비 몇천만 원 더 벌겠다고 승객 안전을 내팽개친 해운회사, 대형 참사 앞에서 허둥대는 정부, 고귀한 생명들이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사이 골든타임을 날려버린 해양경찰청, 엉터리 여객선 안전 감독에 눈감은 해양수산부….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분노는 차츰 슬픔으로 바뀌었다.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신문과 TV에서 안산 단원고 학생 희생자와 유가족의 사연이 소개될 때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릴없는 슬픔은 이내 자책감으로 변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어른이 그랬겠지만, 세월호의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게 내 잘못 같았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괴감이 커졌다.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딸아이의 글을 보고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무심코 한 행동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신호와 차선을 무시하며 곡예를 하듯 차를 몰던 일, 어린이보호구역을 지날 때에도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았던 일, 출근길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밀치고 출입문을 향해 거칠게 내달리던 일, 한강변 자전거 길에서 느릿한 아이들의 곁을 자전거로 속도를 내며 거칠게 지나가던 일…. 일상에서 무심코 저질렀던 소소한 ‘악행들’이 죄다 떠올랐다.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안전불감증 대한민국을 만든 게 아닐까.
정부가 아무리 좋은 컨트롤타워를 세우고 매뉴얼을 꼼꼼하게 만들어도 시스템을 운용하고 지키는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3000개가 넘는 재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도 정부와 해경이 세월호 앞에서 허둥지둥한 건 결국 사람의 문제다. 여객 안전과 관련해 각종 규제를 만들어 놓고도 이를 제대로 실행하고 감독하기는커녕 퇴직 관료들과 검은 커넥션을 만드는 데 정신을 판 것은 해수부 공무원들이었다. 선장과 승무원이 침몰하는 승객들을 버려두고 탈출한 것도 시스템과 제도만으로 바꿀 수 없는 사람의 문제다.
한 나라의 안전문화는 시스템과 매뉴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상의 작은 질서가 모이고 쌓여 만들어진다. ‘더디 가더라도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민이 늘수록 사회는 건강해지고 세상은 안전해진다. 국가개조와 같은 거창한 일보다 일상에서 어른 한사람 한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지 않는 한 꽃다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참사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날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딸아이가 다시는 노란 리본에 글을 쓰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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