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07>부엌 칸타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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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칸타타
―박은율 (1952∼)

저녁을 짓는다
부엌은 나의 제단
일상은 나의 거룩한 구유
나는 부엌의 사제
망사 커튼 드리운 서향 창
저녁놀 아래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마련한다
불과 샘 칼과 도마의 혼성4부합창
압력솥의 볼레로
냄비와 후라이팬과 주전자의 푸가
접시와 사발들의 마주르카
영대 대신 앞치마를 두른
나는 부엌의 제사장
부엌은 성스러운 나의 제단
쉭쉭대는 수증기 설설 끓는 국과 찌개들의 파르티타
당신은 즐겨 흠향 하신다
삶의 싱싱한 비린내와 비루함의 비밀스런 비빔밥
수다스런 푸성귀들의 아삭거리는 음표들
당신이 가장 오래 음미하는 애끓는 간장
말 없는 섬유질의 혀
오늘도 나는 저녁을 짓는다
부엌, 아득할 것도 없는 나의 지평선
맵고 쓰고 짜고 시큼한
넘실거리는 한 잔, 나를 곁들여
참 까탈스런 미식가 당신에게 바친다
공손한 듯 삐딱하게
그래도 두근거리며

‘망사 커튼 드리운 서향 창’으로 저녁놀이 비치는 부엌이라니, 싱크대도 널찍하고 다른 주방기구들도 편리하게 갖춰졌을 테다. 모든 주부가 바라 마지않을 부엌. 그러나 부엌의 주도권을 기꺼이 주부에게 넘기는 가족이 고마울 리 없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밥상을 차리다 보면 마음이 삐딱해지기도 한다. 먹는 건 쉽지만, 얼마나 손이 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인지. 얼마 전까지 살아 있었던 생생한 닭을 토막 내고 생선을 다듬는 섬뜩한 일도 주부의 몫, 처녀 시절에는 얼씬도 않던 ‘쉭쉭대는 수증기 설설 끓는 국과 찌개’를 능란하게 다루면서 문득 ‘내가 부엌데긴가!’ 하는 순간도 있을 테다. 화자는 자신을 ‘부엌의 사제’라 생각하기로 한다. 위험과 잔혹이 도처에 있는 부엌이라는 제단에서 사제는 ‘불과 샘 칼과 도마의 혼성4부합창’을 노래한다. ‘참 까탈스런 미식가’ 남편, 당신이라는 신에게 바치는 부엌 칸타타!

냉장고에서 꺼낸 마른 반찬으로 대충 차리지 않고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부엌 풍경이 눈에 선하다. 필경 이 부엌에는 음악이 틀어져 있을 테다. 어쩌면 바흐의 칸타타가. 라디오는 부엌 필수품. 성전(聖殿)의 성가(聖歌)가 신앙심을 돋우듯, 라디오는 주부 손맛을 돋우리. 옛날 어떤 어머니들은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시며 저녁을 지으셨으리.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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