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배극인]‘란도셀’과 일본사회

  • 동아일보

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손수건은 가로세로 ○cm, 도시락과 신발주머니는 천으로 만들되 가로세로 ○cm. 주머니의 손잡이 위치와 모양은….’ 일본 유치원 준비물 통지문을 처음 받아 보면 입이 벌어진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한 규정을 맞추려면 집에서 자로 재가며 직접 만들어야 하지만 재봉틀이 없어 낭패다. 주문대로 만들어주는 가게도 있지만 여간 비싼 게 아니다. 결국 주말 내내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보지만 규정에 맞는 물품은 없었다. ‘대∼충’ 비슷한 물품을 구입해 보내면 선생님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란도셀’이라는 등에 메는 상자 모양의 가방을 준비해야 한다. 서양의 군대제도와 함께 들어온 란도셀은 당초 군용으로 사용되다 1950년대 이후 전국 초등학교에 보급됐다. 꼭 란도셀이어야 한다는 학교 규정은 없다. 하지만 예외는 없다. 한국식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새겨진 ‘튀는’ 가방을 들려줬다간 곧바로 ‘왕따(집단따돌림)’를 면치 못한다. 이 문제로 아이를 전학시킨 한국 부모도 주변에 있다. 란도셀 색깔은 크게 보면 검정, 파랑, 빨강의 단색이지만 자세히 보면 미묘한 색감 차이가 있고 학교마다 유행이 있다. 입학식 날 보고 ‘대세’에 따라 가방을 교환하는 부모도 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문턱에는 ‘리크루트 슈트(취업활동 복장)’가 대기하고 있다. 남녀 불문하고 취업 면접 때나 수습사원 때 흰 와이셔츠에 검정 재킷, 검정 치마, 검정 바지, 검정 단화가 기본이다. 개인의 개성이 나타나지 않는 데다 잠깐 입고 버려 낭비라는 지적이 있지만 예외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다카시마야’라는 한 대형 백화점이 올해 4월 신입사원 입사식 때 자유복장을 선언하자 전 언론이 작지 않은 비중으로 기사화했을 정도다.

틀에 맞춘 ‘기성 인재’를 만들어내려는 일본의 교육 시스템은 과거 경제 대국화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컨베이어벨트 경제에서는 튀지 않고 조직의 규정에 맞춰 근면하게 일하는 인재상이 바람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는 이제 창조경제 시대의 치명타로 작용하고 있다. 남들과 다른, 튀는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수업시간을 줄인 ‘유토리 교육’을 도입해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학력 저하만 초래했지 창조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장 동력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일본 전자업계가 침몰하고 있는 것도 이런 교육 시스템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다.

남들과 다르면 안 된다는 두려움은 일본 안에 틀어박히려는 ‘우치무키(內向き·내향화) 현상’으로 번지며 네트워크 경제의 발목도 잡고 있다. “중국을 다녀보면 일본 주재원들은 모두 단신으로 부임한다. 설령 가족과 함께 와도 아이가 학교 갈 나이가 되면 돌려보낸다. 아이가 일본 사회에서 낙오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한국 주재원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올뿐더러 아이를 중국인 학교에 보낸다. 이 차이가 중국 시장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명백하다.” 한 일본 경제학자의 책에 나온 내용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일본의 침체와 그 해법으로 교육 문제까지 거론해 본 것은 안타까운 마음에서다. 일본 정치권이 소비세 인상안으로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잃어버린 20년에서 탈출하기 위한 근본 해법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로 인한 국민의 갑갑증과 원망은 화풀이 대상을 밖에서 찾는 보수 우경화로 이어지면서 동아시아 전체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일본사회#란도셀#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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