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최근 독일을 비판하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위기에 처한 남유럽 국가의 어려움은 본질적으로 무역적자이고 이 뒤에는 독일의 막대한 무역흑자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간 독일은 든든한 제조업 기반을 통해 무역흑자를 냈고 남유럽 국가들은 지속적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그리스의 무역 적자규모는 2008년의 경우 국내총생산(GDP)의 14%에 이를 정도였다. 무역적자가 지속되면 유로화가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통화량이 줄고 이를 그냥 두면 디플레의 고통이 찾아온다. 결국 남유럽 정부들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 빠져나간 유로화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러다 보니 재정은 엉망이 됐다. 수출 잘하는 튼튼한 제조업의 부족이 남유럽 국가들의 위기를 부른 셈이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신년연설에서 제조업 부흥을 역설하면서 미국으로 들어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을 우대하겠다고 외쳤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금융산업을 유지하던 미국에서 월가가 위기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월가 점령 시위까지 발생하고 강화된 규제로 인해 은행들의 실적은 엉망이다. 미국과 중국 간에 발생한 엄청난 무역불균형(글로벌 임밸런스)이 위기의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제 미국도 금융업이 아닌 제조업을 통해 불균형을 해소하고 잃어버린 ‘미제(美製)’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적자를 낼 때 중국은 제조업 기반을 통해 막대한 흑자를 올리면서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은 오바마 대통령의 제조업 부흥 메시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는 눈치다.
제조업 경쟁력 유지가 관건
일본 경제는 어떤가. 일본은 31년 만에 처음으로 2조5000억 엔 정도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게다가 주요 기업들의 이번 회계 연도 적자 예상치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소니가 2200억 엔, 파나소닉이 7800억 엔, 샤프가 2900억 엔이다. 1000억 엔의 적자가 예상되는 NEC는 인력을 1만 명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일제(日製)’의 상징인 전자산업의 거인들이 코피를 쏟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심한 부진이 엔고와 지진 등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중장기적 제조업 경쟁력 약화의 산물이 아니냐며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최근 HSBC은행은 ‘좋아 보인다: 2012 한국 국가경쟁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상당한 수준이고 기업 생산성과 수출경쟁력도 유지되므로 성장률 둔화가 제한적일 것이고 하반기부터 외국자본이 집중 유입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을 내놓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우리를 향해 아프도록 쓴소리를 날렸던 그 은행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 세계가 제조업 부흥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는 제조업 기반을 잘 유지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한 번도 연간 무역적자를 낸 일이 없다. 어려운 가운데 분투를 한 우리 기업들이 대견해 보이는 이유이다. 이들이 세계 경제 전쟁에서 승리하여 벌어들이는 달러와 무역흑자로 인해 외환보유액은 지금 3000억 달러가 넘고 우리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잘 피해가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기에 잘 대응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들이 비판받을 부분도 많다. 부족한 고용창출, 부진한 투자, 납품업체 배려 부족, 지나친 다각화 등은 당연히 시정돼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 중 일부는 세계적 현상이며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점으로까지 지적된다. 다양한 논의와 연구를 통해 함께 시정해가야 할 문제이지 분노의 목소리로 ‘재벌 해체’니 ‘재벌세 도입’만 외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소유지배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기업성과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피해는 국민경제 전체에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는 점에서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더욱 조심스럽다. 정책 도입에서 대기업들이 구축한 제조업 기반이 국가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면서 세계 수준급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이러한 놀라운 성과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과 지원을 병행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상생과 나눔이 일어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무분별한 ‘재벌 때리기’ 부작용
최근 가계 사정이 어렵고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이의 시정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정치권은 기업과 국민 간에 갈등과 분노를 부추기며 반사이익이나 챙기려 들지 말고 대·중소기업과 국민 간에 진정한 소통과 화합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지속적이고 장기적이며 바람직한 나눔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단 잘 키워야 나눌 것도 많아지는 것 아닌가. ‘키움’과 ‘나눔’의 절묘한 조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