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다녀왔다. 취임 후 여섯 번째 방중, 두 번째 국빈방문이다. 정상회담은 아홉 번째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중국과 교류가 많은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지만 성적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제 한중관계는 바닥을 치고 반등해야(探底回升) 한다”는 중국 환추시보의 논평처럼 바닥까지 갔다는 평가가 많다.
중국 어민의 한국 해경 살해 사건과 김정일 사망 이후 중국과의 불통(不通) 논란 탓에 이번 방중은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 합의 외엔 특별한 뉴스도, 눈에 띄는 이벤트도, 마무리 회견도 없었다. MB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선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표정에서도 그다지 환한 웃음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MB는 이번에도 중국 지도부 누구를 만나든 똑같은 긴 독백을 되풀이해 늘어놓는 중국식 외교 앞에서 또다시 넌더리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도 일찍이 회고록(No Higher Honor)에서 중국 지도부와의 인민대회당 면담을 “축구장만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세트피스(set-piece) 대화”라고 묘사한 바 있다.
때론 오만한 허세로 비치는 중국식의 답답한 외교는 오랜 역사에서 체득한 중국 특유의 전략적 감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는 근저 ‘중국 이야기(On China)’에서 중국식 대외관계 접근법의 근원에는 비록 천하(天下)의 중심이지만 늘 주변 이민족의 도전에 시달렸던 중국인의 상시적 불안감이 깔려 있다고 진단한다.
사실 돌이켜 보면 김정일 사망 직후 중국 지도부가 보인 태도에서도 주변 어느 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위기감을 읽을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선 누구나 가장 현실적인 계산, 무엇보다 지정학에 바탕을 둔 전략적 사고에 천착하기 마련이다. 특히 주변의 친구와 적을 구분하고 위험을 기회로 만들려는 책략에 골몰하게 된다.
김정일 사망 직후 중국 지도부는 신속한 조문과 함께 김정은 후계체제를 공인했다. 주변국에는 일제히 ‘북한을 자극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최고지도자의 유고에 따른 북한 체제의 혼란, 뒤따를지 모를 내폭(內爆), 이후 그 빈자리에 누가 뛰어들 것을 우려해 서둘러 북한의 나이 어린 새 지도자를 인정하고 주변국에 이를 따르도록 압박한 것이다.
이는 키신저가 짚어낸 중국식 선제공략의 심리전에 기반을 둔 행동이기도 하다. 상대의 약한 부분을 타격할 최적의 순간을 잡아내고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따라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 기정사실화하면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는 손자병법의 수칙을 고스란히 따른 셈이다.
이처럼 신속한 대응에는 중국식 피아(彼我) 기준이 작용했을 것이다. 중국은 북한 급변사태를 ‘걱정’하는 한국 측의 태도를 마치 한국이 급변사태를 ‘기대’한다고 해석한다. 나아가 중국은 한미동맹이 중국을 견제하는 기제로 돌변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요즘 가뜩이나 중국 포위망을 구축하려 하는 미국을 한국이 적극 거들고 있다는 깊은 의구심이다.
이런 근원적 불신을 누그러뜨리지 않고선 수교 20주년의 한중관계에 어떤 반등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미관계에선 “요즘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듣는 MB 정부의 ‘한미동맹 복원’이 낳은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서 균형과 신뢰라는 근본적 질문에 늘 직면해야 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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