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하태원]고구려의 혼 숨쉬는 만주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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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4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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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논설위원
하태원 논설위원
만주를 중국식으로 부르면 동북3성(지린-랴오닝-헤이룽장 성)이다. 발해 멸망 이후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이곳에 19세기 말부터 한인들이 하나둘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지금은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 200만 명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 중국과의 국경선 1416km를 달리다 보면 두만강, 압록강 너머 북한 모습도 훤히 들어온다. 북한과 중국은 황금평·위화도 경제개발지구, 나선경제특구를 통해 경협을 강화하고 있다. 역사와 안보,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현장이 여기다.

18일 중국 지안(集安)에서 본 6.39m 높이 광개토대왕비는 위대한 정복왕의 상징물다운 웅장함과 늠름함이 있었다. 단단한 응회암 네 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1775자(字)는 고구려가 거란을 쳐 요동의 최강자로 군림했고 신라 영토에 들어온 왜구를 내쳤다는 기록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선조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고구려 기상을 대표하는 이 비에 한 발짝 다가서면 광개토대왕이 답답함을 호소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비석 보호 명목으로 주위에 둘러친 플라스틱 벽(壁)이 맹수를 가둬둔 철창 같아 보인다.

비석에서 300m 떨어진 곳에는 광개토대왕릉(태왕릉)이 있다. 네모난 계단식으로 만든 적석총(積石塚)으로 한 변의 길이가 66m나 된다. 지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안타깝지만 기단석은 무너져 있고 무덤의 주인은 오간 데 없다. 주변에는 무덤 안에 넣어 두었던 돌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것이 흡사 석자재를 야적한 느낌이다. 1930년 답사 뒤 “여덟 개의 단으로 구성됐다”고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을 것 같다. 2km 떨어진 언덕에서 아버지 무덤을 지키는 장군총(장수왕 무덤)의 위용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고구려는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산성을 많이 쌓았다. 평지에 성을 두고 있다가 외침이 있으면 산성에 올라가 방어를 하면서 치명적 역공을 펼쳤다. 수나라 당나라를 이겨낸 비결이다. 첫 도읍지인 졸본산성은 해발 806m에 위치한 천연요새다. 안쪽은 남북 1000m, 동서 300m의 평탄지이고 마르지 않는 샘도 있다. 2440m의 성 주위는 100∼200m 높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단 한 차례도 함락된 적이 없다는 신화가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중국은 2004년 고구려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국가지정 명승지로 만들면서 고구려 문화의 중국화 작업을 강화하고 있다. 19일 찾은 5호 묘 내부도 중국 문화재청 관리들의 작업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내부 벽화의 색깔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 같다”는 조선족 가이드 설명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관리 소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훼손되는 것도 속상하지만 관리라는 미명하에 기존의 문화유산에 변형을 가하는 것도 끔찍하다. 유적지마다 배치된 중국인 안내원들은 “고구려는 결국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중국 정부 주장대로라면 2007년에 마무리 됐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 현장에서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민족의 영산’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백두산을 ‘중국 10대 명산’으로 지정하고 스키장 골프리조트 개발도 서두르고 있다.

민족의 뿌리를 지키려는 노력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만 200만 조선족이 고구려 혼을 잇는 적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지안에서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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