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곳은 아직은 한적한 경기 고양시 일산 외곽의 작은 마을입니다. 솔숲에 둘러싸인, 탁 트인 하늘을 늘 바라볼 수 있고 바람소리와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시골 마을에 사는 작은 행복입니다. 마을 정면에는 208m 높이의 고봉산(高烽山)이 우뚝 서 있습니다. 드넓은 평야지대에 고봉산이 홀로 솟아 있는데 ‘하나의 산이 있다’ 해서 이 지역이 일산(一山)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틈날 때마다 고봉산을 오르는 것이 저에겐 작지 않은 기쁨입니다. 휴일 아침이 되면 어떻게 휴일이 돌아온 것을 아는지 저희 집에서 10년째 키우고 있는 개가 아침 일찍 거실문을 ‘똑똑똑’ 두드립니다. “너! 휴일이 됐으니 이제 그만 자고 빨리 고봉산으로 산책을 가자”는 거지요. 개가 저를 끌기도 하고 제가 개를 끌기도 하며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으로 올라가는 시골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봄이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는 벌써부터 풀들이 파릇파릇 나기 시작했습니다. 언 땅에 몸을 박고 그 추운 겨울을 견뎌온 생명력을 보면서 새봄, 새날, 새아침이 왔음을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화창한 날이 계속되다가 한 차례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요즘 날씨에 어울리는 말인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봄은 왔건만 기온은 시도 때도 없이 혹한의 추위 속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에 몸은 오그라들지만 설레는 마음은 벌써 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꽃망울 피고 지는 자연의 순리
‘연분홍 치마가/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산제비 넘나드는/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봄날은 간다.’ 백설희가 처음으로 불렀고 이미자 심수봉 조용필 한영애 장사익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들이 부른 불멸의 명곡 ‘봄날은 간다’가 입속에서 절로 나옵니다.
조금 추우면 춥다고 난리치고, 더우면 덥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봄을 맞는 자연의 모습은 의연하기만 합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가지 위에는 초록색 새순이 돋아나고 어느덧 줄기 끝에는 새하얀 꽃망울이 맺혔습니다. 앙상한 가지와 줄기에서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립니다. 찬란한 봄을 예고하는 전주곡들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꽃의 축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마당에는 숨죽여 기다렸던 산수유를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 목련 철쭉 벚꽃이 찬란할 것이고 이마에 땀이 흐르는 여름이 시작되면 축제를 준비해온 모란 접시꽃 백일홍 봉숭아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것입니다. 그리고 귀뚜라미 소리가 유난히 청아해지면 이번에는 맨드라미 해바라기 과꽃 국화 코스모스의 향연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집 마당에 활짝 핀 목련을 보시고 “봄만 되면 염치없이 너무 많은 꽃을 피우는 목련이 보기 싫다”고 하셨지만 저마다 어떻게 알고 순서대로 자태를 뽐내는 꽃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절기에 맞춰 순서대로 피는 꽃들에 대한 탄성은 자연에 대한 경건함으로 바뀝니다.
제가 나설 때를 알고 때맞춰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의 모습을 보면서 한갓 꽃 한 송이가 사람보다 낫다고 수없이 감탄하곤 합니다.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벚꽃은 벚꽃대로, 국화는 국화대로 제자리를 숨죽여 지키고 있다가 제철이 되면 순서대로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에서 배우고 닮아야 합니다.
물러날 때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지만 앞으로 좋은 날만 남았습니다. 찬란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입니다. 삶이 힘들어 신음조차 나오지 않을 때 수줍게 핀 작은 꽃을 찾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꽃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쌓였던 근심과 분노가 잦아들고 소박한 기쁨이 가슴을 때립니다. 그것이 자연이 주는 작은 행복입니다.
1년 전 홀연히 세상을 떠나신 법정 스님은 저서 ‘홀로 사는 즐거움’을 통해 중국의 고승 임제선사(臨濟禪師)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런 도리를 이 꽃들로부터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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