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를 학생으로 9년 동안 다니면서 두 명의 친구를 자살로 잃었다. 그때마다 언론은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가 그들을 자살로 내몰았다며 학교를 비판했고, 학교는 평판 관리를 위해 ‘재발 방지를 위한 제스처’를 취해 왔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학교를 사랑했고, 과학을 사랑했으며, 공부 스트레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세상의 모든 무덤에는 사연이 있듯이 그들로 하여금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무기력감을 느끼게 만든 요인은 제각각이었다.
창의성 보고 뽑고는 학점만 보나
2004년 교수로 다시 찾아 지난 7년을 함께한 학교의 캠퍼스는 크게 변모했다. 학교는 학생들의 우울증을 상담, 치료해주는 메디컬센터를 캠퍼스 내에 열었고, 예비입학생들이 입학 후 학업을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브리지 프로그램’도 신설했다. 비상연락을 취할 수 있는 전화기가 캠퍼스 곳곳에 설치되고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장치도 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학업량은 훨씬 늘었지만 KAIST 학생들의 자살률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서인지 며칠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든 KAIST 로봇영재의 자살은 같은 캠퍼스에서 수학했던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큰 비통함을 안겨주었다. KAIST는 모든 학생이 함께 공부하는 것을 넘어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기에 삶을 공유했던 친구들의 아픔은 더욱 컸으리라.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즐겁게 공부해야 할 학교에서 학생이 자살한 것은 전적으로 교수와 학교의 책임이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언론은 이번 죽음을 놓고 로봇영재의 과거를 들추고 그의 사생활을 엿본다. 그가 전문계고를 나와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다며 어떤 과목의 점수가 얼마나 나빴는지, 학점이 얼마나 낮았는지 공개하며 영어수업, 과학고생들과의 경쟁에 그 탓을 돌린다. 입학사정관제도와 학점이 낮은 학생에게 차등 지급되는 KAIST 장학금제도까지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 일로 KAIST가 전문계고 학생들을 받는 데 주저할까 봐 오히려 걱정이다.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영재들은 공부가 힘들어 자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믿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자살은 과도한 기대감이나 스트레스 혹은 좌절감을 기대며 의지할 친구나 연인, 가족이 곁에 없기 때문이며 교수와 학교가 그 역할을 해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하고싶은 공부하면 장학금 못 타
로봇에 열정적이었던 한 젊은이를 무엇이 그토록 외롭고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자살한 학생을 포함해 자살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볼 만큼 힘든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학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이공계를 꿈꾸는 KAIST라면 학생들에 대한 정량평가에서 벗어나 개성을 존중하는 창의적인 교육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KAIST가 학교장추천제, 입학사정관제 등 여러 제도로 다양한 경험과 배경을 가진 입학생들을 뽑았듯이 그 학생들이 획일화된 교육을 받지 않고 창의적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성적에 따라 장학금을 차등 지급하는 현 제도는 장학금의 액수와는 상관없이 학생들에게 심한 모멸감과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있다. 대다수가 장학금 혜택을 받기에, 소수의 소외학생들은 차마 부모님께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창의적인 사람일수록, 창의적인 능력의 대가를 돈으로 지급할수록 능력 발휘를 제대로 못하며 집단 내에서의 ‘인정’과 명예가 훨씬 큰 동기부여가 된다고 한다.
한두 학기를 로봇이나 뇌, 컴퓨터, 우주 등에 빠져 학점이 엉망이 돼도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는, ‘실패에 너그러운 학교’가 우리나라에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공부 안 하는 학생에게 세금으로 장학금을 주는 것이 부담된다면 학점에 따라서가 아니라 졸업을 못한 연차초과자에게만 등록금을 부과하는 것이 대안이리라.
이번 기회에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정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입학사정관은 근본적으로 대학 교육을 따라갈 수 있는 수학능력을 깊이 있게 보는 것이 제 역할이며, 학생의 개성적 성과는 그 위에서 더불어 판단해야 한다. 다양한 제도를 통해 입학한 학생들이 한 가지 잣대로 경쟁하지 않도록 교육의 다양화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한다.
이번 로봇영재의 자살이 어찌 KAIST만의 문제이랴. 친구를 자살로 잃어본 자의 무기력함과 안타까움은 대한민국의 학교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만든다. 가장 먼저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며 우리나라 대학 교육의 리트머스시험지가 되고 있는 KAIST의 불행은 조만간 다른 대학이 겪게 될 불행일지도 모른다. 대학이 ‘학점과 경쟁의 요람’이 아니라 ‘창의적인 학문의 요람’이 되기 위해서 한 학생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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