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종훈]유럽이 알려준 ‘복지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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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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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2010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폭설과 추위라고 하지만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 휴가를 악천후 때문에 망친 사람이 수백만 명을 넘는다. 바다를 건너 가족을 만나고 따뜻한 아프리카나 지중해로 휴가를 즐기러 떠나려던 많은 유럽인이 눈 폭탄으로 일격을 맞고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임을 확인했다.

일주일 가까이 교통이 마비된 공항에서 수천 명이 담요 하나로 밤을 지새워도 당국에 강하게 항의하는 목소리조차 듣기 힘든 게 우리로선 잘 이해되지 않는 풍경이지만 후유증은 오래 갈 것 같다. 히스로 공항과 영국공항공단에 엄청난 벌금이 부과되고 비행기를 타지 못 해 피해를 본 시민들의 집단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각국에서 정부 차원의 조사를 진행하고 특히 영국은 유사시 공항공단에 무거운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제화도 추진한다.

지난해 10월 알카에다가 유럽의 주요 관광시설에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면서 영국 프랑스 독일에 여행주의보가 발령됐다. 11월에는 예멘발 미국행 화물기에서 프린터 토너로 위장된 폭탄이 나왔다. 또 그리스 주재 각국 대사관에서 책 등으로 위장된 소포 폭탄 14개가 발견됐고 여러 개가 폭발했다. 12월에는 로마 주재 스위스, 칠레 대사관에서도 무정부주의 단체가 보낸 소포 폭탄이 터졌다. 소포 폭탄은 테러의 주체와 기법에서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 사건이다. 유럽 주요공항이나 역에서 가방이나 짐 꾸러미를 자리에 남겨 놓고 움직이려면 주변의 눈치와 의심을 감수해야 할 지경이 됐다.

하지만 지난해 서유럽 국민의 삶과 정신적 가치를 가장 크게 뒤흔든 건 역시 재정 적자에 따른 ‘복지 축소’이다. 많은 세금을 내고 실제로는 빠듯하게 살면서도 그나마 나라가 베푸는 복지 혜택에 자부심과 안도감을 갖고 살아온 유럽인에게 긴축예산의 파장은 정말 컸다. 상반기에는 그리스, 하반기에는 아일랜드가 돈이 없어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포르투갈 역시 손을 벌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적자가 쌓이고 있는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은 벌써부터 잔인할 만큼 뼈를 깎는 긴축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수십만 명의 공무원 일자리가 없어지고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부가가치세 등 각종 세금은 큰 폭으로 오르고 연금은 축소되는 바람에 서민의 삶은 더욱 찌들 형편이다. 등록금이 3배로 오르고(영국), 장학금이 90%나 축소(이탈리아)되자 학생까지 무더기로 거리로 나와 폭력 시위를 벌인다. 지난 10년 내에 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잘사는 나라의 대명사로 1인당 국내총생산이 한국의 2배가 넘는 서유럽 국가들이 이처럼 일제히 돈이 없어 허덕이게 된 이유는 뭘까. 쉽게 말해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은 시스템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특히 무분별한 사회보장비 지출이 아주 큰 원인 중 하나다. 지금 당장 외부에서 돈을 빌리고 나라살림을 아껴서 산다고 바로 나아지리란 보장도 없다. 돈을 벌고 이자를 갚으려면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데 긴축으로 곳간이 텅 빈 데다 세계 경제가 지난해보다 급속히 나아질 전망도 없다. 한국도 일부 대선주자의 복지정책을 놓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뜨겁다. 교육 못지않게 백년대계를 내다봐야 할 복지정책은 포퓰리즘이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버려야 할 국가적 어젠다이다. 한국도 다를 것 없다. 서유럽의 고통을 타산지석으로 삼기 바란다.

이종훈 파리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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