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최영해]오바마의 책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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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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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간선거(11월 2일)가 임박하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표밭을 누비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달 들어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을 타고 각 주를 돌아다니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워싱턴 인근의 버지니아 주에선 페어팩스 시와 폴스처치 시에서 두 차례나 타운홀 미팅(주민 간담회)을 열었다. 와이셔츠 차림에 소매를 걷어붙인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마치 2008년 대통령 유세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민주당 의원 후원행사에 참석해 연설하며 돈을 모아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타운홀 미팅도 그저 반상회 차원이 아니다. 여기서 집권 2년 동안의 치적을 홍보하면서 민주당 후보를 찍어달라고 호소한다. 최우선 개혁과제로 내세웠던 건강보험개혁과 금융개혁법안을 선전하는 무대도 바로 이곳이다.

공화당이 집권하면 ‘부자들만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은근히 위협하기도 한다.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 다수당이 되면 차기 하원의장으로 유력한 존 베이너 공화당 원내대표 지역구인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를 찾아선 “백만장자(가구 연소득 25만 달러 이상 계층)들에겐 절대로 세금을 깎아주지 않겠다”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감세정책을 모든 계층에게 연장하겠다는 베이너 대표의 공약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이 야당인 베이너 대표 이름을 수차례나 거론하며 “공화당은 나쁜 당”이라고 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철도, 도로, 공항 활주로를 깔아 일자리를 늘리겠다며 예산 50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약속하고 신규 설비투자 기업에 세금 2000억 달러를 공제해주겠다는 선심성 공약도 내걸었다.

25일 대통령 주례연설에선 “공화당은 억만장자, 백만장자에게 세금을 깎아주자고 합니다. 공화당 공약은 낡아빠진 철학에 뿌리를 두고 중산층의 희생을 발판으로 가진 자들에게 선물을 주자는 겁니다”라며 공화당의 공약을 대놓고 비난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행동했다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엄격히 규정한 한국의 선거법에 따르자면 오바마 대통령은 탄핵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2004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가 국회에서 탄핵 결의를 당해 직무가 정지됐던 게 6년 전이다. 한국 선거에 익숙한 기자로선 행정부 최고 수반인 오바마 대통령의 앞뒤 가리지 않는 ‘선거 올인’ 행보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처럼 드러내놓고 선거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규정한 선거법 조항이 미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행정부 수반인 동시에 정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중시하는 게 미국 정치 풍토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에 의회 다수당을 지켜야 2년 후 대통령 재선 가도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한국 국회의장은 당적을 버려야 하지만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여당 의원 모금 행사에서 자금을 끌어들이느라 분주하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과 군사 정권 때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이용해 선거에 개입한 아픈 경험 때문에 우리는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다. 5년 단임제 때문에 임기 절반이 지날 즈음이면 대통령의 힘이 빠지고 마지막 해엔 차기 여권 대권주자가 대통령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탈당을 요구해야 인기를 끌었던 게 우리 정치사에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도 이제 미국 대통령식의 책임정치를 논의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최영해 워싱턴 특파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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