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시장실패 美월가, 정부실패 南유럽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8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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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겪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됐다. 각국 정부의 과감한 재정투입으로 그럭저럭 사태가 수습되는 듯했으나 올해 들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재정 부실에서 비롯된 2단계 경제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PIGS(돼지들)로 불리는 남유럽 국가들이다.

미국발 위기와 남유럽발 위기는 매우 다르다. 전자는 민간금융회사의 부실로 시작된 반면, 후자는 재정파탄으로 불거졌다. 전자가 ‘시장의 실패’라면 후자는 ‘정부의 실패’다.

시장맹신주의 vs 포퓰리즘

미국발 위기의 진원은 시장제일주의의 상징인 월가였다. 많은 경우 시장은 효율적인 결과를 낳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방임에 맡겨진 시장은 독과점, 빈부격차, 불공정거래, 환경 기초과학 등 공공재의 공급 부족, 공황 등 갖가지 실패를 가져오기도 한다.

2008년 금융위기는 공황 형태의 실패다. 금융,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서 거품은 천천히 부풀지만 꺼질 때는 한순간이다. 그 순간 신용위기가 발생하면서 급격한 경기후퇴나 공황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 이런 거품 붕괴는 1929년 대공황 이후에도 숱하게 반복됐지만 불행히도 투기와 탐욕에 눈이 먼 자산시장의 기억력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된다.

반면 PIGS 위기는 시장과 무관하다. 공공개혁 실패, 강성노조, 부패 등 요인도 거론되지만 직접적인 것은 역시 재정부실이다. 이는 또 감당할 수 없는 복지를 국가부채로 뒷받침한 포퓰리즘의 결과물로 ‘정치의 실패’다. 그리스 정부가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세금 인상, 공공부문 임금 동결, 연금 삭감을 골자로 하는 긴축재정안을 마련하자 국민들은 연일 항의시위를 벌였다. 재정의 역할에 대해 올바른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유권자의 실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는 정반대 현상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서로 긴밀히 연결되는 부분도 있다. 예컨대 월가의 실패는 시장실패이지만 뿌리를 더듬어 가면 금융건전성 감독 소홀, 즉 정부의 과소규제로 인해 빚어진 일이다. 정부실패가 시장실패를 불러온 셈.

한편 금융위기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다. 금융거품 붕괴에 따른 쇼크를 재정거품으로 달랜 것. 덕분에 시스템 붕괴는 모면했지만 국가부채가 급증했다. 특히 PIGS의 경우 이미 공공부채 문제가 한껏 부푼 상태에서 재정거품이 추가 주입되자 그만 풍선이 터져버렸다. 이처럼 금융위기는 ‘과소규제’라는 정부실패의 결과물인 동시에 ‘재정파탄’이라는 또 다른 정부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월가식 시장실패를 원천봉쇄하겠다”며 정부가 금융시장에 마구잡이식으로 간섭하다가는 금융산업 발전이 요원해진다. 필요한 것은 건전성 감독이다.

官治와 건전성규제는 전혀 달라

반대로 “PIGS식 정부실패는 안 되겠다”며 사회안전망을 내팽개치고 신자유주의, 시장맹종주의로 흐른다면 그 또한 낭패다. 효율도 결국 사람을 위해 추구하는 것일진대.

한국의 국가부채는 증가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아직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지방정부의 예산낭비 및 효과가 의심스러운 대형 공공프로젝트다. 현재 파산 직전에 몰린 지방공기업을 가진 지자체가 하나둘이 아니다. 대수술이 필요하다.

왕도가 있겠는가. 시장의 효율성을 취하되 절제된 개입으로 시장과 정부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금융자유화를 추진하면서도 그에 맞춰 건전성 규제를 강화해가는 것이다. 세상사 어디서나 중요한 것이 절제와 중용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공무원들이 관치금융과 건전성 감독을 혼동하는가 하면, 이 감독권을 악용해 민간은행의 인사를 쥐락펴락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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