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겸허한 수용” 말하는 여권, 敗因부터 제대로 알아야

  • 동아일보

청와대는 어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6·2지방선거 패배에 대해 “민의를 겸허하게 수용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도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선거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지난해 10·28 재·보선에서 2 대 3으로 패했을 때도, 같은 해 4·29 재·보선에서 0 대 5로 참패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선거에 졌다 하면 자동응답기처럼 ‘겸허한 수용’을 말하지만 과연 패인(敗因)이나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한나라당은 자만에 빠져 더 크게 졌다. 야권 후보들이 ‘MB정권 심판’의 기치 아래 후보를 단일화하고 선거 전날 저녁까지 함께 골목을 누비는 동안 한나라당 사람들은 “천안함으로 끝난 선거”라며 다 이긴 것처럼 행동했다. 한나라당은 한때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당선이 확실하다고 보고 그를 경기 인천의 지원유세에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오 후보는 턱걸이로 재선 관문을 통과했다. 오만과 방심이 화(禍)를 부르는 법이다.

극심한 공천 난맥상은 결정적 패인이다. 강원 경남 등 전통적인 한나라당 강세 지역에서 야당과 무소속 후보가 인물론 세대교체론의 힘을 받아 강세를 보였다. 반면 한나라당은 지역사회를 위해 발품 한번 판 적 없거나 지역 현안에 관해 토론 준비도 안 된 후보를 낙하산식으로 공천했다. 특정 실세(實勢)나 현역의원들이 지역 기반이 탄탄한 현역단체장을 공천에서 떨어뜨려 총구를 거꾸로 겨누는 ‘여-여 대결’도 적지 않았다. 일부 국회의원의 공천 장사 냄새도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 않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싸고 친이(친이명박), 친박(친박근혜)이라는 고질적인 계파갈등의 불화 속에서 승리는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책임 있는 당원’으로서 자신의 지역구를 빼고는 지원유세에 나서지 않았다. 헌신하지 않는 리더십은 팔로어십(지도자에 대한 지지)을 잃게 된다.

겸허히 수용해야 할 민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환골탈태도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세종시 수정안과 4대강 살리기에 대한 반대론이 적지 않았지만, 정부와 한나라당의 설명은 미흡했다. ‘스마트 정당’ ‘첨단 디지털 정당’을 표방했지만, 정작 인터넷과 트위터를 통해 20, 30대 표심을 잡으려는 치열한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고질적인 웰빙체질 타파를 위해 정부 여당의 전면적인 인적 개편이 불가피하다. 기득권을 쥐고 신예들의 등장을 가로막는 낡은 정치행태를 불식하지 않으면 한나라당에 희망이 없다. 둑이 터지는데도 자기 논밭 챙기기에만 바쁜 족속들은 대폭 물갈이돼야 한다. 10년 만에 재집권한 한나라당은 2년 3개월여 만에 위기를 맞았다. 국민이 표출한 ‘한나라당 피로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들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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