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미움의 독기부터 걷어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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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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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에서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콜리오네 집안의 아버지가 아들 마이클에게 “적을 미워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도는 아니지만 미움이 앞서면 판단을 그르친다는 충고다. 영화에서 마이클의 형 소니는 적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뛰쳐나갔다가 톨게이트에서 총탄 세례를 맞는다.

사례 하나 더. 2006년말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 회의를 다룬 기사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란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홀로코스트는 과장”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나치가 저지른 600만 학살에 눈을 감은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 회의에 참가한 ‘네투레이 카르타’라는 유대교의 극우 분파가 “학살은 신의 뜻”이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유대인의 유랑은 메시아가 등장해야 끝나며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스라엘 땅에 돌아가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스라엘 해체 운동을 벌이며 그 연장선에서 이란의 홀로코스트 과장론에 동조했다. 같은 유대인들 간의 미움이 더 무섭다.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미움으로 인한 맹목의 오판을 볼 수 있다. 천안함 폭침 사건을 둘러싼 억측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유시민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의 발언을 보자. 그는 “폭발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어뢰설 기뢰설 버블제트 등은 억측과 소설”이라고 말했다. 정부 합동조사단의 공식 발표 전에 나온 발언이라고 해도 북한의 소행 가능성을 100% 배제한 것은 정상적인 판단으로 보기 어렵다. 이번 선거에서 친노(親盧)의 선두 주자로 반(反)MB 전선에 몰두하다가 소설같은 말을 한 셈이다.

민주당도 정부 합동 조사단이 어뢰와 관련한 증거를 내놓자 북한의 잘못보다 정부의 안보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급기야 “김정일이 잘못 했다는 건가, 이명박이 잘못했다는 건가” “어느 나라 정당이냐”는 소리도 듣고 있다. MB심판론을 내세우다가 졸지에 북한 봐주기냐는 말을 듣게 됐다. 야권의 이런 분위기가 드러나자 북한은 남한 종교 사회단체에 전송문을 보내 ‘어뢰 공격설은 역적 패당이 꾸면낸 날조’이라며 남남갈등을 선동하고 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최근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에서 “6.25 전쟁을 침략전쟁이라 하면서 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이 평화통일에 이바지하는 길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6.25 전쟁은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초전에서는 북쪽에 의해 통일될 뻔 했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썼다. 6.25 전쟁은 북이 일으켰지만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적개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강 교수는 먼저 북한이 6.25 전쟁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침묵할 뿐이다. 유신 정권의 탄압 등은 여러 군데서 언급하면서도 박정희 정부의 경제 성장에 대해서도 한마디 긍정도 하지 않는다. 평화통일주의자라는 강 교수도 그에 대한 미움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다.

국내외의 사례로 미뤄보면 적에 대한 지나친 미움은 그 자체가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움 자체가 기질이나 버릇 또는 습관이 되는 것 같다. 특히 정치적 승부수를 띄운 선거판이어서 그런 기질이 쉽게 드러났지만,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친북좌파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울타리마저 허물려 하고 있다. 그들에겐 이념보다 미움의 독기를 걷어내는 게 더 시급해 보인다. 미움은 자기부터 파괴시킨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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