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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8일 02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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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하 서울은 세계적인 ‘디자인 도시’로 변신 중이다. 깨끗하고 질서 있는 도시 미관을 통해 서울의 문화적 품격은 물론 국제경쟁력까지 높이겠다는 의도에서다. 20세기가 국가전성시대였다면 21세기는 도시중심시대이고, 도시의 위상과 역량을 가늠하는 요소로서 문화가 으뜸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한 결과다. 겉모습이 곧 문화는 아니라며 “군자가 사는 한 누추함은 없다(君子居之 何陋之有)”고 공자는 말했다지만 필시 그건 아무나 탐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막상 우리는 도시의 건물과 가로, 혹은 간판이 시각적으로 현대화하고 기능적으로 첨단화하는 것에 대해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게 될까. 그것은 도시 디자인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가 딱하기 때문일 수 있다. 아니면 오래되어 익숙한 것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가지는 개인적 미련이나 향수 탓일 수도 있다.
서울 피맛골 재개발의 아쉬움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도시의 고유한 문화적 자산과 매력이 소멸하는 데 따른 어떤 문명사적 불안감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알고 있듯 지금까지 인류는 ‘문화’를 기반으로 엄청난 성장과 진보를 이룩해 왔다. 문화가 없기에 가령 사자나 독수리 세계의 삶은 수천 년 전이나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오직 인간사회만이 지식과 정보의 기록, 보존, 축적 및 전수를 통해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한 문화의 무대이자 보고는 역사적으로 늘 도시였다. 그래서 도시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도시를 ‘문화의 컨테이너 혹은 용기(容器)’라고 정의했다. 동서고금에 걸쳐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공연장, 학교 따위가 도시에 밀집해 있는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의 시인이자 문화평론가인 랠프 에머슨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낡고 지저분한 구도심 지역이 신천지로 개벽하는 작금의 과정이 아무래도 섭섭한 것은 결국 그로 인해 서울이라는 도시가 자신의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서울의 정체성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창조적 경쟁력도 둔화시키는 선의(善意)의 부작용을 자초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이런저런 상념은 우리나라의 도시계획이나 도시재생 사업이 다분히 도시공학적 혹은 건설산업적 접근이라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물론 지난날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화 과정에서 그것이 수행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은 나름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학적 내지 산업적 발상에서는 사람과 역사와 문화가 아무래도 도로나 건물 혹은 자동차에 밀리기 십상이다. 또한 무언가 불규칙하고 불분명하며, 어딘가 불투명하고 불편한 모습은 눈엣가시가 되기 마련이다. 언필칭 ‘문화도시’를 강조하면서도 몇 군데 문화시설이나 갖추고 몇 차례 문화행사만 가지면 충분할 줄 아는 단순한 생각도 그 뿌리는 같다.
600년 ‘古都의 기억’ 보존해야
인구 1000만 명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조만간 굴지의 세계도시로 거듭나는 것 자체는 너무나 필요하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600성상(星霜)을 보내는 동안 여기저기 알게 모르게 쌓여 있는 고도(古都)의 기억을 보존하고 복구하려는 노력 또한 결코 게을리 할 수 없다. 이 일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상승효과가 기대되는 사실상 똑같은 작업이다.
서울의 디자인 도시혁명이 성공하려면, 따라서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의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과연 혜안을 가졌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는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하며 “공과대의 도시공학과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우선 철학이나 역사 같은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시에서 사는 일반시민들의 인식도 함께 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침 10일은 작년에 제정돼 올해로 두 번째 맞는 ‘도시의 날’이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sang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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