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지향]노 대통령이 ‘체임벌린’ 되지 않기를

  • 입력 2007년 8월 22일 03시 02분


1938년 9월, 뮌헨에서 히틀러와 협상을 끝내고 돌아온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는 귀국해서 “세기의 평화가 정착했다”는 일성을 터뜨렸다. 히틀러는 엄연한 주권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지역을 독일인들이 거주한다는 이유로 독일에 할양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막무가내를 들어준 것이다. 국민은 환호했지만, 1년이 채 못 되어 유럽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에 휘말렸다.

2000년 6월,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 도착 후 “이제 한반도에 전쟁 위협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 후 남한이 환각에 빠져 있는 사이 김정일은 핵무기를 몇 개 만드는 실적을 올렸다.

체임벌린이나 김 전 대통령 같은 유화론자들은 협박하는 측이 부당한 요구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의 전략적 취약성을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너그럽게’ 가정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상대편이 좀 더 안전하게 느껴 덜 공격적이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기대한다.

그러나 유화정책이 ‘위험한 적’을 ‘평화를 사랑하는 신사적인 적’으로 변화시킨 예는 역사적으로 없다. 그것은 오히려 위협하는 측의 욕심을 더욱 부추기고 다른 나라들도 모방하게 만듦으로써 국제질서를 더욱더 교란할 뿐이다.

히틀러에 속아 넘어간 영국신사

결과적으로 협박하는 측은 점점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게 되며, 유화정책은 그들을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유화정책이 성공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취해진 정책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인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깨닫지 못했다. 집단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유대인들을 처형한다는 소문이 돌 때도 영국 신사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좌파 국수주의자들은 감히 김정일을 히틀러에 비유하느냐고 언성을 높이겠지만, 제 나라 백성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김정일은 히틀러보다 낫다고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잔뜩 관심을 불러일으킨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연기되었다. 10월, 임기를 넉 달여 남긴 대통령과의 회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순리대로라면 당연히 차기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변명을 가져다 붙이고 ‘합리적 분석’을 한다 해도 이번 정상회담이 대선용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김정일로서는 경제적 실익이나 대미 관계도 계산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일을 막아야겠다는 점에서 참여정부와 의견일치를 본 것 같다. 노무현 정부가 역부족인 상황에서 김정일이 구원투수로 등장한 꼴이다. 말로는 수해 때문이라고 하지만 8월 말보다는 10월 초가 대선에 미치는 영향력의 측면에서 더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우리가 특히 주의할 점은 목표 달성을 위해 김정일이 파격적인 제안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실향민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한다든지, 핵시설의 불능화를 선언한다든지 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젠 체임벌린과 영국 국민의 어리석음을 따라 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는 수밖에 없다.

일단 국민은 실속 없는 말잔치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김정일은 합의 내용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없던 일로 돌릴 것이다. 히틀러도 다시는 생떼를 쓰지 않겠다고 한 뮌헨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올 12월에 김정일에게 휘둘리지 않을 대통령을 선출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나아가 국민은 이번에 약속되는 대북 경제지원에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부담해야 할 세금은 얼마나 되는지를 정부에 냉정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급격히 늘어난 세금으로 이미 어깨가 늘어진 납세자의 당연한 권리이다.

남북 정상회담 말잔치 경계해야

정부는 비록 지극히 정략적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왕에 만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뒷거래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북핵 문제를 최우선으로 다루어야 한다. 벌써부터 핵 문제는 거론하지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회담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체임벌린은 역사상 가장 무능한 정치인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역사에 남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지향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서양사

jihang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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