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권력의 黑鶴白鶴論?

  • 입력 2005년 9월 5일 03시 02분


얼마 전 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국민여론이 비이성적이라는 뜻으로 “국민의 70%가 학이 검다고 하면 학이 검어지는 것이냐”고 한 말이 여운을 남긴다. 이름하여 ‘흑학백학론(黑鶴白鶴論)’이라고 부를까?

수사학이 발원하고 꽃피운 고대 그리스에서 같은 질문을 했다면 아마도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철학이 수사학으로부터 분화되지 않고 여타의 과학이나 기술도 발달하지 않던 당시에는 진리의 준거가 종종 다중(多衆)에게 있었다. 무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수 앞에서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을 면치 못했다. 시민법정에서 학을 검다고 하면, 그 학은 검은 학이 되는 식이다.

당시 철학자들은 삼단논법 같은 논리적인 기술을 구사했는데,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대중이 공유하는 상식이다. 즉 ‘인간은 죽는다’는 상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너도 죽는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의중을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믿음 등이 한때 진리로 자리 잡았던 근거도 따지고 보면 대중의 힘이었다.

다중의 믿음이 진리를 가늠하는 일은 눈부신 과학의 발달로 점차 무너졌다. 하지만 세 치 혀끝에서 나오는 웅변술과 설득, 사람의 생각을 바꿀 만한 증거 제시의 중요성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 전통의 한 끝이 서양 법정의 배심원 제도에 남아 있고, 토론은 지적인 유희 내지는 경연대회(debate tournament)의 형태로 내려오고 있다. 경연대회라는 말 그대로, 토론에서는 승패가 가려지는데, 여기서 승패를 가려 주는 사람은 물론 대중이다.

다수결로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 체제와 여론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현대 정치 역시 아직 다수의 힘이 살아 숨 쉬는 영역이다.

빼어난 지도자가 여론을 선도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홍보수석의 말대로 여론이 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여론은 딱히 옳고 그름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고, 늘 설득의 대상이며, 수시로 바뀐다. 크든 작든 선거에서 이겨 본 사람은 이렇게 변덕스러운 여론의 숙련된 조련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물며 대통령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여론의 생태를 모를 리가 없다. 홍보수석의 흑학백학론이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 것은 여론을 대하는 권력자의 논리가 수미쌍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대로 국민이 제왕이고 대통령이 신하라면, 어찌 임기를 다 채우기도 전에 그만둘 생각을 내비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온 국민이 하루 일을 접고 투표를 해서 시킨 일자리를 졸지에 ‘못해 먹을 일’로 폄훼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여론이 그렇게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연정론 같은 민감한 정치권의 이슈를 e메일로 보내 전 국민이 돌려 읽게 만들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다수를 불신하면서 어떻게 여소야대의 푸념이 나올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일부 국민이 그를 ‘검은 학’이라고 했으나, 그보다 많은 국민이 그를 ‘흰 학’이라고 해서 지금의 자리에 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국민에게 바로 돌아서서 ‘흑학백학론’을 펴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여론과 힘겹게 씨름해야 할 정부에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스캔들로 시끄러웠을 때, 미국의 여론이 그에게 너그러웠던 이유를 당시 호황을 누리던 경제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스캔들의 상대로 폴라 존스라는 여인이 불거지자 “‘폴라 존스’가 어쨌건 ‘다우존스’(미국의 대표적인 주가지수)만 좋으면 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일견 사납고 변덕스러워 보이지만 여론을 친구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겸허하게 맡은 일을 충실히 하고, 에너지의 방향을 국민으로 돌리며, 일관된 언행으로 정서적인 안정을 주고, 능력이 된다면 좀 더 잘 살게 해 주면 된다.

흑학이건 백학이건, 맘과 몸이 편하게 해주는 지도자를 여론은 원한다. 색깔의 진리성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소피스트들에게나 맡길 일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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