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정문술 미래산업 前사장-안철수 대표

  • 입력 2001년 1월 8일 18시 22분


안철수(왼쪽)·정문술
안철수(왼쪽)·정문술
《훌훌 털고 경영일선에서 떠난 정문술(鄭文述)전 미래산업 사장. 은퇴 발표 직후 본인은 “날아갈 것 같다”고 했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그는 벤처기업의 암흑과 여명기, 그리고 ‘예상치 못한 대박’과 ‘처절한 추락’을 모두 경험한 벤처 1세대. 그의 경험과 노하우를 ‘대물림’하는 것은 벤처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정 전사장은 처음엔 이를 거절했다. “은퇴한 사람이 자꾸 나서는 것은 진정한 은퇴가 아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안철수대표(안철수연구소)는 반갑게 맞이했다. 또 할 말도 했다. 그는 지난주 말 안대표와의 대담을 통해 ‘간접화법’으로 경영철학과 인생관을 쏟아냈다. 한국벤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이 대담을 동아일보 최수묵 경제부 차장의 사회로 지상 중계한다.》

▽사회〓두 분은 비즈니스적으로 전혀 이해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평소 서로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다. 세대를 뛰어 넘는 교감이 있는 듯하다.

▽정문술 전사장〓벤처 1세대로서 믿음직스러운 후배에게 ‘양질의 유전자’를 넘기고 싶었다. 안철수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모임인 ‘벤처리더스클럽’의 회장을 물러날 때도 사실은 그 자리를 안대표에게 넘기고 싶었다.

▽안철수 대표〓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인데 은퇴하시니 마음이 착잡하다. 벤처업계의 정신적 지주를 잃게 돼 허전하고 두렵다. 하지만 후배들을 편하게 해주고 떠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에 존경을 금할 수 없다.

▽정 전사장〓안대표 같은 후배들이 많았다면 벤처업계가 지금처럼 매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퇴 결심을 하면서 안대표가 여러 번 떠올랐다. 벤처업계를 잘 이끌어 달라는 당부를 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

▽안대표〓물려주신 뜻을 잘 받들어 ‘영혼이 있는 기업’을 만들어 나가겠다. 특정인이 있든 없든 기업은 영속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아직도 정 전사장의 은퇴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은 것 같다.

▽정 전사장〓권력이 얼마나 놓기 힘든지를 실감했다. 혹자는 기업경영자가 무슨 권력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권력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한번 맛들이면 끊기가 어렵다. 은퇴를 결심해놓고도 하루에도 서너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형식적으로 물러난 후 수렴청정을 해볼까하는 유혹도 솔직히 느꼈다.

▽사회〓후배 기업인들에게 해줄 충고가 많을 것 같다.

▽정 전사장〓정의로운 기업이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보편적인 윤리나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기업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둘째, 얕은꾀나 재주를 부리지 말고 상도의를 지켜야 한다. 사업은 제압하고 제압 당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익을 보는 관계다. 셋째, 기업은 주주와 종업원 모두의 소유라는 것을 알고 실천해야 한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정을 느끼고 열정을 바치게 된다. 기업을 잘 하기 위한 각론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첫째, 남을 따라하지 말고 독자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비슷하게 할 바에는 차라리 강자와 합하는 것이 낫다. 둘째, 해외로 나가야 한다. 셋째는 정부정책에 눈치를 보지말고 시장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사회〓공직생활과 기업인의 삶을 공교롭게도 18년씩 했다. 두 삶을 비교하자면….

▽정 전사장〓기업인의 삶이 훨씬 어렵다. 공직을 택할 때는 정년까지 일할 생각이었다. 정열과 청춘을 아낌없이 바쳤는데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남들이 그렇게 선망했던 공직을 즐기지 못한 게 후회된다. TV에서 사냥개들이 호랑이나 표범을 공격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만 사냥개가 홀로 호랑이와 맞닥뜨린다면 금방 잡아먹힐 것이다. 그러나 사냥개가 호랑이에게 사납게 덤벼들 수 있는 것은 뒤에 있는 포수 때문이다. 공직은 그런 것이다. 뒤에 공권력이라는 포수가 있기 때문에 그 존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업은 다르다. 기업인은 ‘권투선수’다. 피할 수 없는 사각의 링에서 별도의 무기도 없이 트렁크스 하나 걸치고 맨몸으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숨을 곳이 없다.

▽사회〓현재 벤처기업의 상황이 어렵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정부가 ‘과보호’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 전사장〓지금 벤처기업 상황은 지극히 정상이다. 오히려 요순시절이다. 벤처기업을 지정하고 지원해주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위험을 무릅쓰고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벤처기업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공하는 건 벤처기업이 아니다. 정부지원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을 죽이는 ‘독약’이다. 나는 월 2.0∼2.5%의 사채로 기업을 일으켰다. 사업 초기에는 은행돈을 써봤지만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필요하지도 않은 돈을 이자를 물면서 갖고 있어야 했고 괘씸죄에 안 걸리려면 정기적으로 거래은행 관계자를 ‘관리’해야 했다. 정책자금도 두 번 써본 뒤 아예 끊었다. 이런 저런 서류제출 요구가 너무 많았다. 또 제약요건이 많아 돈을 제때 필요한 곳에 쓸 수 없었다. 정책자금을 활용해 잘 나간 기업도 있다. 나도 한때 이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들 기업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가 닥치자 대부분 도산했다. 정부지원에 기대면 기업은 경쟁력을 잃게 된다.

▽안대표〓6년 전 기업을 시작할 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매우 좋은 편이다. 당시에는 중소기업으로 자금이나 인력이 전혀 유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급인력이 벤처기업으로 몰리고 지분을 투자하려는 투자가도 많다. 99년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사람들이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 같다. 정부는 ‘터’를 닦고 도로를 만드는 ‘외곽 조성’에만 나서야 한다. 정부가 직접 장사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문제다.

▽사회〓두분 모두 ‘직원 제1주의’를 모토로 경영을 했다. 인사정책도 독특하다. 안대표의 경우는 자기주식 8만주를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정 전사장〓인사원칙 중 하나가 친인척 배제였다. 두 아들은 각각 현대자동차연구소와 삼성카드사에 근무했다. 미래산업 주변에는 얼씬도 안 했다. 주변의 청탁이 많았지만 인사에 관한 한 정도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최고경영자도 임직원 중에서 선발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안대표〓사람을 뽑을 때는 능력보다 철학을 중시한다. 정신적 성취감이 물질적 성취감보다 우선하는지를 따진다.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바람에 앞으로 6개월간은 코스닥 등록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직원 모두가 이심전심 만족해 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앞으로의 계획은….

▽정 전사장〓카네기나 록펠러처럼 돈을 잘 쓰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겠다. 그들만큼 큰돈은 없지만 디지털과 벤처시대에 맞는 생산적 자선모델을 만들 생각이다. 다시 한번 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권력을 놓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돈을 놓기 위한 싸움이다. 노욕(老慾)이 두렵지만 신앙생활로 극복하겠다. 내 자신과의 싸움에 한번 이겨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길 자신이 있다.

▽안대표〓돈을 벌기 위해 벤처기업을 시작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대부분 자기실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 너무 돈을 좇다보면 돈이 멀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회사가 견실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이익을 추구해야 하지만 공익을 함께 추구해야 신뢰를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익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사회와 조화를 이루고 초심을 잃지 않는 기업경영을 하겠다.

두 사람은 좌담을 끝낸 뒤 굳게 악수했다. 정 전사장은 “벤처는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했고 안대표는 “열심히 하겠습니다”고 답했다.

▼ 24살차 두사람의 공통점 ▼

정문술과 안철수. 그들은 사업상의 거래관계는 물론 지연이나 학연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극과 극을 달린다. 나이도 스무네살 차.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 각별히 아끼고 존경한다. 닮은 점이 많기도 하지만 벤처기업의 원칙에 관한 한 ‘지향점’이 같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두 맨주먹으로 벤처신화를 일궈냈다.

정 전사장은 83년 미래산업을 창업, 반도체장비를 처음으로 국산화하는 등 기술외길을 걸어온 끝에 ‘성공벤처 1호’를 키웠다. 안대표는 88년 뇌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했을 때 이를 퇴치하는 ‘백신’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일어섰고 95년에는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를 설립, 세계적 수준의 컴퓨터보안업체로 발전시켰다.

두번째 공통점은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고 한번 세운 원칙은 초지일관 지킨다는 점. 정 전사장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직원들에게 기업윤리와 상도의를 강조했다. 그는 미래산업이 96년 증권거래소에 상장할 공모가를 처음보다 2배로 올리면서 수백억의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었으나 기업윤리가 우선이라고 주장, 처음 공모가를 고수했다.

‘공익’을 중시하는 안대표는 일반인들에게 바이러스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는 원칙을 흔들림없이 지켜나가고 있다.

두 사람은 99년말과 작년초 무분별한 투자열풍이 불 때 벤처거품을 한목소리로 경고했다. ‘기업은 수익구조를 통해 이익을 내야 하며 돈놀이를 해서는 안된다’는 믿음도 똑같았다. 주변 기업인들에게는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꾸준히 강조했다.

이밖에 두 사람은 인생의 절반을 과감히 접고 벤처기업에 도전하는 모험정신을 가졌다. 정 전사장은 공직에서, 안대표는 의사에서 벤처기업가로 변신했다.

▼ 정문술 미래산업 전 사장 ▼

△38년 전북 임실면 출생

△64년 원광대학교 종교철학과 졸업

△62∼80년 중앙정보부 근무(기조실 조정과장)

△83년 미래산업 창업

△97, 98년 최우량 기업상 수상(한국능률협회)

△99년 라이코스코리아 대표

△2000년 연세대 기업윤리상 수상

△저서:왜 벌써 절망합니까

▼ 안철수 대표 ▼

△62년 부산 출생

△86년 서울대 의대 졸업

△91년 서울대대학원 의학박사

△86∼89년 서울대 의과대학 조교

△89∼91년 단국대 의과대학 학과장

△95년 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 창업

△2000년 10월 제14회 인촌상 수상

△2000년 6월∼현재 IA시큐리티 대표

△저서:별난 컴퓨터 의사 안철수, 바이러스 분석과 백신 제작, 안철수의 바이러스 예방과 치료 등

<사회〓최수묵차장·정리〓천광암기자>m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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