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漢詩엔 더위 쫓는 풍류가 있다

  • 입력 2000년 7월 21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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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들과 함께 읽는 한시 명편’. 책 부제가 주는 고답적인 인상이 전부였다면 손사래부터 치고 봤을 터이다. 책을 펼치면 장마다 넉넉한 여유와 세련된 풍취가 그윽하다. 감칠맛 나는 번역문은 고답스런 문어투나 고색창연한 수사와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매 시편마다 붙은 시화(詩話)를 읽는 재미는 여느 시선집에서도 볼 수 없는 묘미다.

이 책이 나온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서울대 인문대학 2동 3층 끝방 ‘자하헌(紫霞軒)’이란 당호가 붙은 ‘교수합동연구실’이 있다. 실은 인문대 교수들이 수담(手談)과 한담(閑談) 나누는 휴게실. 1992년 봄 어느날, 낙서판으로 쓰이던 하얀칠판에 중문학과 이병한(李炳漢) 교수가 중국 한시를 한 편씩 적기 시작했다. 국문과 영문과 독문과 등 인문대 타과 교수들이 하나 둘씩 호응해 오면서 시 품평과 촌평이 오가기 시작했다.

98년 정년퇴임한 이교수는 6년간 계속된 ‘한시 과외’에서 소개한 180수를 계절별로 추렸다. 꼼꼼한 번역문과 해설을 붙였고 ‘자하헌’에서 오간 한담을 덧붙여 책으로 묶었다.

책에 실린 한시는 익히 알려진 이백 두보 백거이 등 삼가(三家)의 명작보다는 낯선 이름의 정감 넘치는 작품이 많다. 당초 감상자들이 비전공자임을 감안해 전고(典故)나 고유명사가 적은 작품을 골랐다. ‘연잎은 바람결에 향기 보내고 / 댓잎에 맺힌 이슬 맑은 소리 내며 방울져 떨어지네’(맹호연 ‘꿈에도 그리운 사람’중)와 같은 ‘여름편’ 시들은 한 여름 대낮에 우물물로 등목한 듯 청량하다.

시 못지 않게 눈길을 붙잡는 것이 매 시편 말미에 붙인 ‘산창한담(山窓閑談)’이다. ‘자하헌’ 바둑패들이 시정(詩情)을 논하는 묵객으로 일취월장하는 과정이 살갑게 그려졌을 뿐 아니라, 노학자들 사이에 오가는 고준담론과 자유객담이 실명으로 실렸다.

영문과 황동규 교수는 시인답게 ‘시탐(詩貪)’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늘 새로운 한시를 내놓으라며 이교수를 보챘고, 그 안목 또한 수준급이어서 “우리 한시가 중국시보다 어렵다”거나 “송시(宋詩)가 당시(唐詩)에 비해 싱거운 편”이라고 촌평할 정도다.

영문학과 이병건 교수는 열의가 남달랐다. 자전을 뒤져가며 낯선 한자나 고사성어의 뜻을 밝혀내는 일을 전담하며 ‘조교’를 자임했다. 이병한교수는 ‘석좌 조교’ 예우 차원에서 그에게 미리 역주와 해설이 적힌 카드를 보여주곤 했다 한다. 하루는 판서(板書)하는 것보다 앞서 다음 나올 글자를 미리 구점(口占)해 황교수로부터 책을 잡힌다. “‘동몽선습’에 나오는 작품인가? 어찌 이 선생이 다음 나올 글자까지 미리 알지?”.

국문학과 조동일 교수는 ‘김삿갓급’ 재기(才氣)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외사씨(外史氏)’라는 별호로 한시를 패러디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곤 했던 것이다. 이교수가 송대 소식의 ‘자화상’이란 시를 적었을 때였다. ‘心似己灰之木, 身如不繫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P州’(마음은 다 타버린 나무토막이요/ 몸은 매여놓지 않은 배/ 묻나니 그대 평생 업적이 무엇이뇨?/ 황주, 혜주, 담주에서 귀양살이하였더라네).

이 옆에 ‘외사씨’가 남긴 묵적(墨迹)은 이러했다. ‘心似新春之花, 身如晩秋之木, 問汝平生功業, 開講休講終講’(마음은 새봄의 꽃이요/ 몸은 늦가을 나무/ 묻나니 그대 평생 업적이 무엇이뇨?/ 개강 휴강 종강뿐이었더라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지식인들의 ‘한담(閑談)’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마지막 ‘풍류의 기록’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한시과외’ 멤버 중 상당수가 이미 정년으로 학교를 떠났고, 수년내에 ‘자하헌’은 이곳이 당대 선비들의 진정한 정신적 사랑방이었음을 모를 후학들로 메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 '이태백이 없으니 누구에게 술을 판다?' / 이병한 엮음/ 민음사 /1권 225쪽, 2권 196쪽 각권 1만원.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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