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재단 남북포럼]한승주/무엇이 北을 움직였을까

  • 입력 2000년 5월 2일 19시 50분


6월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은 역사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최소한 남북간 긴장완화와 화해를 가져다 줄 수 있고 나아가 통일에 이르는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 한반도에는 반세기 전 민족상잔의 6·25전쟁이 일어나 남북한을 합쳐 무려 200만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6·25전쟁 50주년이 되는 시점에 남북간 최초의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정상회담이 과연 전쟁과 불신으로 얼룩진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인가?

정상회담이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북한이 무슨 이유에서 회담을 열기로 작정했느냐를 알아보는 일이다. 남한 역대 정부와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 했다. 남북간 평화 공존관계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의 기반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반면 북한은 한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정상회담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독일이 서독에 의해 통일된 이후에는 북한은 특히 체제수호를 위해 남한과의 교류를 제한하고 통제했다. 1994년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을 수락한 적은 있으나 남한에 닫혀 있는 북한의 문을 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김정일 승계 후 남북정상회담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이 북한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는가? 그 설명으로 ‘동기’와 ‘여건’을 구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동기란 왜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필요로 했느냐는 것이다. 여건이란 무엇이 북한으로 하여금 정상회담을 해도 괜찮다는 판단을 하게끔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경제적인 이유에서이다. 북한은 식량 에너지 사회간접자본 부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식량문제는 국제적인 지원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고 해도 에너지와 도로 항만 배전선 등 사회간접자본은 남한 정부의 지원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존망의 기로에서 남한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한 것이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이 외교적 정치적 효과도 가져올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먼저 지지부진한 미국 일본과의 교섭에 자극을 주려는 것이다. 한국이 경제원조 등 북한에 대한 지레를 선점하고 대북 관계에서 기선을 잡는 상태에서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은 또 김정일에게는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공적을 국내외에 선전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펴고 있다. 일차적으로 내부적인 반대의견을 잠재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는 김정일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남한의 지원이 필요하더라도 북한으로서 정상회담을 결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번 남한과의 물꼬가 트이게 되면 그것이 북한 체제에 가져오는 부담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과연 김대중대통령의 맞수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에 있어 이번 정상회담은 1994년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수락했을 때보다 훨씬 큰 모험을 의미한다. 김일성의 정상회담 결단이 영웅심의 산물이었다면 김정일의 결심은 철저한 계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이런 여러 우려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북한정부가 정치적인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은 부친이 사망한지 6년째인 지금 자신의 정치적 위치가 탄탄하다고 판단할 정도로 세력기반을 구축해 놓은 것이다. 동시에 남북한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수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이번 정상회담이 승산 있는 도박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는 정상회담을 북한이 처음부터 무산시킬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북한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결심한 회담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한반도의 평화와 궁극적인 통일로 연결시키는 데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이다.

한승주(21세기 평화재단 이사·전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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