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천년을 여는 세기적인 전환의 문턱에서 새 대통령을 뽑는 선택의 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민족의 미래와 국가의 진운을 거는 선택이자 21세기가 희망과 불안으로 갈릴 수 있는 선택이다. 이 중차대한 선택 앞에서 국민의 마음은 무겁고 착잡하다. 나라의 경제는 짙은 먹구름에 휩싸여 있고 대통령을 향해 뛰는 후보들은 미래에 대한 경륜과 가슴 탁 트이는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금년 1월1일자 본보 연두제언(年頭提言)에서 이번 제15대 대통령선거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1997년이 국민통합의 국가운영을 위한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올해는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두 높은 도덕률과 윤리의식을 회복하고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활력을 잃어가는 국가사회를 위기에서 구하는 의식혁명에 나서자고 제안한 바 있다. 올 한 해야말로 우리 국가 사회가 발전이냐 정체냐를 결정짓는 중대한 기로에 설 것으로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올해 우리에게 닥친 시련은 가혹했고 나라를 책임진 정치인들은 턱없이 안일했다. 올해 정치권은 한보사태의 「몸통」시비와 대통령아들의 구속, 92년 대선자금 공방으로 정치 경제가 마비된 끝에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포괄적 사과성명으로 상반기를 허송했다. 하반기에는 기아사태를 비롯한 대기업의 부도, 법정관리, 외채태풍, 외환위기 끝에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으로 국가가 「법정관리」에 처하는 꼴을 당하게 됐다. 나라 사정이 정체가 아니라 퇴행을 거듭하고 외국인들까지 한강의 기적은 끝났다고 공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권력다툼으로 날을 지새고 정부의 정책은 표류했다. 정치는 통합과 화해가 아니라 대립과 반목으로 내달렸고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위기 앞에서 무기력을 드러냈다.
이러한 시기에 나라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할 대통령선거가 국가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간다면 그보다 더한 낭패가 없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법정선거운동이 시작되지만 새 대통령은 국경없는 무한경쟁 속에서 이 나라를 희망과 번영으로 이끌어야 할 막중한 책무를 짊어져야 한다. 그러한 국정 최고책임자가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이 정치지도자로서의 최소한의 사명감과 도덕성도 저버린 채 상대방 후보나 헐뜯고 일시적인 인기에 매달려 국가와 사회를 분열의 늪으로 밀어넣는다면 그런 선거가 무슨 소용인지 새삼스레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제난국의 와중에 치르는 대선이 소모적 정치행사라는 비난을 들어서도 안된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마당에 대선후보들부터 솔선해서 경제살리기에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야 옳다.
지금 선거 현장은 후보간 정책경쟁보다는 상호 비방과 인신공격으로 얼룩지고 있다. 이런 식의 선거라면 누가 당선되든 그는 또 한사람의 불행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본인과 동아일보는 이 개탄스러운 선거국면을 깊이 우려하면서 이번 선거에 임하는 우리의 입장과 각오를 독자 앞에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오늘의 위기는 국민 모두가 책임져야 할 난국이다. 그 가운데서도 문민정부 5년을 파탄경제로 마감하려는 김대통령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다시는 무책임하고 대책없는 대통령을 뽑아서는 안된다』는 자성(自省)의 소리가 국민들로부터 나오지 않도록 유권자들은 대선후보들의 국정운영능력을 철저히 지켜보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동아일보는 이번 대통령선거가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정책경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도하고 논평할 것이다. 주요 현안에 대한 후보들의 정책을 상세히 전달하고 이를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 제시함으로써 유권자들의 바른 선택을 돕는 충실한 정보제공자 역할을 다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 후보, 어느 정당에도 기울지 않고 편들지 않는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엄정중립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고자 한다.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불공정 경쟁은 물론 정치윤리와 국민통합을 해치는 비민주적 선거행태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든 가차없이 지면을 통해 고발하고 비판함으로써 언론 본연의 파수꾼 기능에 어느 때보다 충실하려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정정당당한 경쟁을 통해 당선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동아일보는 언제나 성역없는 정론직필(正論直筆)과 비판적 언론으로서의 사명에 투철할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의 새 지평을 여는 이번 대통령선거가 헌정사상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공정하고 깨끗하고 희망에 찬 선거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유권자와 후보자들 그리고 선거 관리당국이 다 함께 합심해 이 나라 선거사에 하나의 신기원(新紀元)을 이룩할 것을 간곡히 호소해 마지 않는다.
김병관 (동아일보 발행인)